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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의 취재노트]역사의 피해자 잊지 않는 美

입력 | 2015-10-14 03:00:00

‘콜럼버스 데이’서 ‘원주민들의 날’로




신석호 특파원

‘콜럼버스 데이’인 12일 미국의 수도 워싱턴 거리에서는 스미스소니언박물관 등을 찾는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여느 일요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탈리아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523년 전인 1492년 10월 12일 신대륙(서인도제도의 산살바도르 섬)을 발견한 것을 기념하는 퍼레이드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같은 차분한 분위기가 이날을 ‘원주민의 날’로 바꿔 불러야 한다는 미국인들의 역사적 자성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집에 돌아온 뒤였다. AP통신에 따르면 현재 미네소타 주 세인트폴 등 9개 도시가 이날을 콜럼버스의 날과 동시에 원주민의 날로 지정해 기념하고 있다.

10월 12일을 콜럼버스의 날로 지정한 것은 1934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서이다. 이후 1971년부터는 10월 둘째 월요일을 연방 공휴일로 지정해 기념해 오고 있다. 하지만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미국의 건국 과정에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겪은 고통과 희생도 함께 기려야 한다는 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퍼레이드와 기념식은 반대 시위대의 강력한 저지에 부닥쳤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해 원주민 집단 보호구역이 있는 사우스다코타 주는 1990년 이날을 ‘원주민의 날’로 이름을 바꿨고 캘리포니아 주의 버클리도 1992년 이에 동참했다. AP통신은 “화려한 퍼레이드와 기념행사는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진행된 원주민 거주지역 점령과 차별, 노예화 및 제국주의 등 아픈 역사를 간과한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앞서 11일에는 조지아 주 스톤마운틴 공원이 흑인 인권 운동가인 마틴 루서 킹 목사의 기념물을 세우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이 공원은 남북전쟁 당시 흑인 노예 제도 존치를 주장한 남부연합군 지도자들의 부조상(浮彫像)이 있고 백인 우월주의 인종단체인 큐클럭스클랜(KKK)이 노예 해방 직후 흑인을 습격하기 위해 집결한 장소로 알려진 곳이다.

스톤마운틴 기념협회는 남부군 지도자 부조상 위 산꼭대기에 ‘자유의 종탑’을 세우고 ‘내겐 꿈이 있습니다’라는 킹 목사의 유명한 연설문 구절과 ‘조지아 주의 스톤마운틴에서 자유가 울리게 하라’라는 문구를 함께 새길 방침이다. 아직 아물지 않은 미국 내 흑백 갈등의 역사적인 화해를 시도한다는 의미다.

건국 이후 미국의 역사는 서부 개척 잔혹사와 흑인 노예 제도를 둘러싼 내분과 전쟁, 중남미 국가들에 대한 무력 개입 등 어두운 단면을 지니고 있다. 흘러간 역사를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끊임없는 반성과 성찰, 화해를 위해 노력하는 미국인들의 성숙한 역사의식에 머리가 숙여지는 하루였다.

워싱턴=신석호 특파원 ky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