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잠 자는 버릇 하나 못 고치면서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 자아비판하면서 아침형 인간을 무척 부러워했다. 그런데 희망적인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했다. 오후가 되면 비로소 생기가 돋는 나 같은 야행성에게도 장점이 있는데, 아이디어나 창의력 같은 것은 밤에 더 잘 떠오른다는 내 귀에 솔깃한 이론이다. 그뿐인가, 느림이란 글자에 미학이란 고상한 말이 붙어주었고, 심지어 지난주 신간 중에는 눕는 것에 대한 예찬서도 있었다. 야행성에다 눕기 좋아하는 내가 늘 마뜩지 않았는데, 이렇게 기대고 싶은 든든한 이론적 배경이 생기니 문득 오래 알고 지내는 교수님 생각이 났다.
그 교수님은 세배를 가면 새해 결심을 하나씩 말씀하시곤 했다. “나, 올해부터 점심은 안 먹기로 했어.” 그러면 점심을 안 먹어야 할 이유가 논리정연하게 펼쳐진다. 또 “나, 이제부터 모자 쓰고 다니기로 했다”라고 하시면 모자를 써야 하는 이유가 그럴듯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결심이 바뀌면 번복하는 이유들이 또한 설득력 있다.
돌이켜보면 50대 이후 세대는 너무 선택지가 제한된, 아니 무조건 ‘하면 된다’는 하나의 깃발 아래 뭉쳐 있었다.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해야겠지만 최선을 다해야 하는 지향점과 얼마만큼이 최선인지는 각자 다르다는 것을, 그리고 때론 최선을 다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줄 몰랐다.
애초부터 세상일이란 대부분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이다. 무엇이든 다 양면성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타고난 것의 단점에 기죽기보다 장점을 살리는 편이 낫다. 있는 그대로, 그것이 건강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윤세영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