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원 논설위원
일부 교과서는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 같은 것을 조직해야 한다”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정읍발언(1946년 6월)을 분단의 원인처럼 서술하고, 북한에선 실질적 정부 역할을 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이미 1946년 2월 조직된 사실을 흐려놓았다.
6·25전쟁이 미국과 이승만 정권의 자극 때문에 일어났다는 주장은 브루스 커밍스 등 미국 수정주의 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수정주의는 1980년대 말 공산권의 붕괴와 함께 스탈린의 극비 전문 등 실증적 자료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엉터리였음이 판명됐다. 1990년대 모스크바 유학을 통해 이 자료들을 연구한 정치학자들에 의해 동시책임론이니 남침유도설이니 하는 잠꼬대 같은 소리는 정치학계에선 일찌감치 폐기됐다. 그럼에도 국사학자들이 장악해온 국사 교과서의 근현대사 서술에선 아직도 북한의 남침을 명확한 사실로 기술하기를 꺼리는 듯한 대목이 적잖이 남아 있다.
이들 의식화된 386세대가 교수, 교사, 교과서 필자가 되면서 진보적 시각과 다른 방향에서 석·박사 논문을 쓰려 해도 적절한 지도교수를 구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세계사적으로 공산주의가 몰락한 1990년대 이후 소비에트연방에서 버려지고, 중국에서 문화혁명 이후 찬밥이 된 이념형 교재들과 북한을 ‘내재적 관점’에서 이해하자는 역사관이 현대사 서술의 주요 진지들을 지배하게 됐다.
세계사의 흐름에 담을 쌓은 채 일국사(一國史)에 갇혀 있는 그들의 손에만 국사 교과서를 맡겨 둘 수는 없다. 지난해 전국역사학대회에서 이성규 서울대 교수(동양사학)는 “역사학자가 운동권 학술전사로 자처하고, 역사 논쟁을 서명운동과 시위로 해결하려는 풍조는 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국정이냐, 검인정이냐 논쟁보다 중요한 것은 정치학 국제정치학 경제학 등 사회과학의 다양한 비교사적 연구 성과를 반영하고 학문 간, 사상·이론 간의 자유경쟁을 통해 보편적 설득력을 갖는 사실관계를 정리하는 일이라고 본다.
현대사는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 꿈틀거리며 살아있는 현실의 정치, 경제, 사회다. 지혜와 학식이 풍부한 사학자와 사회과학자들이 한데 모여 대한민국의 오늘에 관한 공동의 정체성을 찾아나갈 때 친북이나 자학 사관도, 친일·독재 미화도 발붙이기 어려운 균형 잡힌 교과서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박성원 논설위원 sw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