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발해학회 국제학술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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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열린 고구려발해학회 학술회의 ‘고구려와 발해의 경계’. 고구려발해학회 제공
요서는 대릉하 하류와 의무려산을 기준으로 다시 동서로 나눌 수 있다. 이 박사는 ‘고구려와 북조의 경계’라는 발표문에서 “고구려는 북위에 내란이 발생한 틈을 타 요서 동부에 진출했다”라고 말했다.
수나라 사람인 한기(韓기)의 묘지(墓誌)에는 북위 내란 중에 한상(韓詳)이라는 인물이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요동으로 끌려갔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 비슷한 시기 강과(江果)라는 인물이 영주(營州·현재의 차오양 시) 서쪽의 안주성민(安州城民)을 이끌고 고구려로 들어왔다는 기록도 있다. 이 박사는 “이는 고구려가 대릉하 하류까지 진출했고, 영주 일대까지 영토로 삼을 기회가 있었지만 더 이상의 세력 확대를 자제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러나 반론도 나왔다. 이노우에 나오키 교토부립대 교수는 “수나라 장수 이경의 무려성 공격에 관한 기록이 적은 것, 고구려가 수 양제의 침공을 요하에서 막으려고 한 것은 당시 요하 서쪽 지역은 고구려 영토라는 인식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정호섭 한성대 교수도 “요서 동부는 일종의 완충지대와 같은 곳이어서 고구려가 일시적으로 군사적 교두보를 뒀다고 해서 고구려의 영토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이날 학술회의에서는 말갈 유적 발굴 성과를 재검토한 결과 전성기 발해의 영역이 아무르 강 너머까지 이르렀다는 정석배 한국전통문화대 교수의 발표도 나왔다. 공석구 교수는 “고구려 발해의 영역에 관해 기존의 연구 결과보다 사료를 적극적으로 해석한 학설을 종합적으로 제시한 첫 학술대회”라고 평가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