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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선물이 내게 준 의미

입력 | 2015-10-20 03:00:00


이원희 아베크 매거진 에디터

아침저녁으로 이불 속이 꽤 추워졌다. 특히 아침에는 알람이 두세 번 울려도 벌떡 일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니 정말 가을이 왔나 보다. 10월의 첫 주에는 새로운 계절을 반긴다는 마음으로 대청소를 했다. 제일 오랜 시간 머무는 방의 구조를 바꿨다. 침대는 창가에서 멀리 떨어진 쪽으로 옮기고 소파는 창가 밑으로 옮겼다. 따뜻한 햇볕을 쬐고 싶어서 책상도 창가 밑으로 옮겼다. 책꽂이는 책상의 짝꿍처럼 붙여 놓았다. 청소를 할 때 가장 공을 들인 곳은 책상이었다. 열심히 쓸고 닦았다. 뽀얗게 내려앉은 먼지가 생각보다 많았다. 오른쪽에 올려져 있던 책들은 왼쪽으로 옮기고 왼쪽에 있던 책상 등은 오른쪽으로 옮겼다. 이렇게 많은 것들이 책상 위에 있었나 싶었는데 그 과정에서 몇 개의 물건이 눈에 띄었다. 책 CD 연필 등. 모양과 쓰임새는 제각각이지만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누군가에게서 선물 받은 것이라는 점이다.

장난기가 발동했다. 정리를 멈추고 책상 위의 물건들을 한쪽으로 대충 밀어 놓았다. 그동안 받은 것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서대로 나열해봤다. 선물을 준 아무개도 생각나고, 어떤 이유로 받았는지, 받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함께 떠올랐다.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그중 몇 개를 골랐다. A가 준 손때 묻은 은색 만년필은 지금은 의미 없는 기념일에 받은 것이고, 존경하는 작가의 일기가 담긴 두툼한 책은 생일 선물로 B에게서 받았고, 도시의 야경이 커버에 그려져 있는 CD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C에게서 받은 것이다. 두어 개 더 있었는데 그것은 생략하기로 하고, 가장 오랫동안 붙들고 만지작거린 것은 은색 만년필이었다. 뚜껑을 열고 닫을 때 ‘딸각’ 하는 소리가 참 마음에 드는 필기구였다. 보통 필기구보다 짧고, 얇아서 한 손에 쏙 담기는 그 느낌도 참 좋았다. A가 오랫동안 사용했던 것이라 남다른 기분으로 받았던 기억도 떠올랐다. 그 후 나는 삼 년 넘게 이 만년필을 사용했고, 언젠가부터 펜촉이 말썽을 부렸다. 옆으로 줄줄 새는 잉크는 만년필을 잡고 있는 오른손 손가락에 거뭇거뭇 묻었고, 결국 불편함을 견디지 못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리고 연필꽂이에 꽂아 두었나 보다. 연필꽂이에 꽂는 필기구가 늘어날수록 만년필은 점점 묻혔고, 가을맞이 청소를 하지 않았으면 겨우내 연필꽂이에 있었을 것이다.

이 만년필로 A는 어떤 글을 썼을까. 괜히 뚜껑을 열었다가 닫아 보기도 하고, 손가락에 올려 놓고 빙빙 돌리기도 했다. A와 함께했던 지난날들이 빙빙 돌고 있는 만년필처럼 눈앞에 아른거렸다. A에게 선물을 받았던 당시 만년필에 대한 나의 욕심은 놀부 심보였고, 갖고 싶었던 것을 받았기에 마냥 좋아했다. 그 자리에서 노트부터 펼치고 밑줄도 그어 보고, 이름도 써 봤다. 연필꽂이에 만년필을 꽂으며 함께 묻어두었던 추억도 하나둘 꺼내기 시작했다.

선물을 주고받는 것은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설렌다. 준비하는 사람의 마음과 받는 사람의 마음이 맞닿으면 설렘은 순간을 만들고, 순간은 추억이 된다. 작은 만년필 한 자루가 청소하길 잘했다고 되새길 정도로 큰 의미가 남아 있었고, 그 의미가 나도 모르는 어떤 곳에 숨어 있으리라 생각이나 했을까. 그리고 이미 내 손을 떠나 누군가의 책꽂이, 책상, 가방 속에 있을 물건들을 떠올렸다. 대부분 값이 비싸고, 반짝반짝 윤이 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물건들이다. 아마도 선물의 값이 받는 사람의 기분과 비례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상대와 내가 선물을 주고받으며 나눈 추억의 값은 환산할 수 없기를 소박하게 바라본다.

만지작거리던 만년필은 필통에 넣어두었다. 펜촉을 새로 바꾸기 전까진 사용하기 힘들 것이다. 그래도 굳이 연필꽂이가 아닌 필통에 넣어두는 것은 선물 받을 당시 그 기분을 가을이 가기 전까지 간직하고 싶기 때문이다. 언제 다시 연필꽂이로 돌아갈지 모르겠지만, 아무렴 어떤가. 가을이니까. 계절을 핑계 삼기 좋은 날들이니까 괜찮다.

이원희 아베크 매거진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