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희 아베크 매거진 에디터
장난기가 발동했다. 정리를 멈추고 책상 위의 물건들을 한쪽으로 대충 밀어 놓았다. 그동안 받은 것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서대로 나열해봤다. 선물을 준 아무개도 생각나고, 어떤 이유로 받았는지, 받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함께 떠올랐다.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그중 몇 개를 골랐다. A가 준 손때 묻은 은색 만년필은 지금은 의미 없는 기념일에 받은 것이고, 존경하는 작가의 일기가 담긴 두툼한 책은 생일 선물로 B에게서 받았고, 도시의 야경이 커버에 그려져 있는 CD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C에게서 받은 것이다. 두어 개 더 있었는데 그것은 생략하기로 하고, 가장 오랫동안 붙들고 만지작거린 것은 은색 만년필이었다. 뚜껑을 열고 닫을 때 ‘딸각’ 하는 소리가 참 마음에 드는 필기구였다. 보통 필기구보다 짧고, 얇아서 한 손에 쏙 담기는 그 느낌도 참 좋았다. A가 오랫동안 사용했던 것이라 남다른 기분으로 받았던 기억도 떠올랐다. 그 후 나는 삼 년 넘게 이 만년필을 사용했고, 언젠가부터 펜촉이 말썽을 부렸다. 옆으로 줄줄 새는 잉크는 만년필을 잡고 있는 오른손 손가락에 거뭇거뭇 묻었고, 결국 불편함을 견디지 못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리고 연필꽂이에 꽂아 두었나 보다. 연필꽂이에 꽂는 필기구가 늘어날수록 만년필은 점점 묻혔고, 가을맞이 청소를 하지 않았으면 겨우내 연필꽂이에 있었을 것이다.
이 만년필로 A는 어떤 글을 썼을까. 괜히 뚜껑을 열었다가 닫아 보기도 하고, 손가락에 올려 놓고 빙빙 돌리기도 했다. A와 함께했던 지난날들이 빙빙 돌고 있는 만년필처럼 눈앞에 아른거렸다. A에게 선물을 받았던 당시 만년필에 대한 나의 욕심은 놀부 심보였고, 갖고 싶었던 것을 받았기에 마냥 좋아했다. 그 자리에서 노트부터 펼치고 밑줄도 그어 보고, 이름도 써 봤다. 연필꽂이에 만년필을 꽂으며 함께 묻어두었던 추억도 하나둘 꺼내기 시작했다.
만지작거리던 만년필은 필통에 넣어두었다. 펜촉을 새로 바꾸기 전까진 사용하기 힘들 것이다. 그래도 굳이 연필꽂이가 아닌 필통에 넣어두는 것은 선물 받을 당시 그 기분을 가을이 가기 전까지 간직하고 싶기 때문이다. 언제 다시 연필꽂이로 돌아갈지 모르겠지만, 아무렴 어떤가. 가을이니까. 계절을 핑계 삼기 좋은 날들이니까 괜찮다.
이원희 아베크 매거진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