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
“그렇게 고르기 어려우면 그 네 가지 중에서 공통되는 걸로 하지.”
“그럼 뭐가 되는데요?”
“그럼 두 자밖에 안 되는데?”
“외자 이름도 많아요.”
그렇게 나는 ‘이라’가 되었다. 지방법원에 가서 개명을 신청하고 얼마 후 ‘성남 이씨’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눈에 띄는 통지서가 도착했다. ‘그럼 이제 내가 초대 성남 이씨가 되었나’ 싶어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이미 한 분이 계셨다. 성남일화 축구단의 러시아 출신 라티노프 데니스가 2003년 귀화하면서 ‘이성남’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개명해 성남 이씨의 시조가 된 것이다. 인터넷에서 ‘이라’를 찾아보면 우선 보이는 것은 ‘자음으로 끝나는 체언의 뒤에 붙어, 앞 말을 특별히 강조하여 가리키면서 그것이 일이나 행동의 주체임을 나타내는 주격 조사’라거나 ‘작은 천불동이라 불리는 익근리계곡’ ‘서울여행이라 쓰고 방문이라 읽는다’ 등의 설명이었다. 병원 같은 곳에 가면 처음 듣는 말이 “성함?”인데, 내 이름을 얘기하면 반드시 두 번 이상 묻는다. “이라요?” 아니면 “외자요?” 하고. 이름을 결정하던 날 남편과 조금 더 얘길 했어야 했다.
몽골 친구들에게 개명한 새 이름을 알려주자 ‘李’가 남편 성인지부터 물어본다. 나는 “한국에서는 이름이 다 김 씨나 이 씨”라고 농담 삼아 얘기하곤 한다. 이제는 나도 그 많은 이 씨 중 한 명이다. 몽골에선 평상시 주로 이름만 사용한다. 성은 아버지의 성과 이름 중 이름 부분을 물려받아 성으로 쓴다. 내 아버지의 성은 울지후(Ulzihuu), 이름은 네르귀(Nergui)이고, 나는 성이 네르귀, 이름은 게렐(Gerel)이 되었다. 남편이 아직도 신기하게 생각하는 몽골 문화가 이 부분이다. 한국으로 귀화하고 호적 등록을 할 때 몽골 출생증명서를 내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내 ‘성’이 되는 것을 한참 설명해야 했다. 미국처럼 여자가 결혼하면 남편을 따라 성이 바뀌는 문화도 있지 않은가.
이름을 짓는 유행은 점차 달라졌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몽골에 자본주의가 들어오면서 나타샤, 유라, 안드레 같은 러시아식 이름은 더이상 쓰지 않게 되었다. 그 대신 옛날 친러시아 정권 아래서는 아예 쓸 수 없던 칭기즈, 테무친이나 옛날의 왕, 왕비 이름을 많이 썼다. 이런 이름이 너무 많아지자 요즘엔 유명한 인물들이나 소설가, 학자 이름을 쓰는 추세다.
고등학생인 아들이 재채기를 하더니 내게 옮긴 것 같다. 병원에 가서 이름을 말하고 기다리고 있으니 부른다. “라님∼!” 독특한 간호사다.
내 독특한 이름 때문에 한 번 만난 사람들도 나를 쉽게 잊지 않는다. 러시아 친구들은 러시아에서 ‘이리나’를 ‘이라’로 줄여 부르는 습관 때문에 이름이 ‘이리나’냐고 묻고, 몽골 친구들은 러시아식 이름으로 개명했느냐고 묻는다. 한국에선 아직도 가끔 ‘아라’로 바꿔 부르거나 ‘이이라’로 쓰시는 분들이 있긴 해도 나는 이제 내 이름이 좋다.
※ 이라 씨(38)는 몽골 출신으로 2003년부터 한국에서 살고 있다. 2010년부터 4년간 새누리당 경기도의원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다문화여성연합 대표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