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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꽃과 恨을 원색의 예술로 남기고 떠난 천경자 화백

입력 | 2015-10-23 00:00:00


화가 천경자 씨는 타고난 예술가였다. 미술에 대한 천부적 재능뿐 아니라 생각도 행동도 유별났다. 부모 반대를 무릅쓰고 17세 때 일본 유학을 떠났으며, 방학 때면 요란한 옷차림으로 나타나 어머니는 기차역에 마중을 갈 수 없었다. 그의 작품세계는 꽃과 여인을 테마로 그린 강렬한 채색화로 상징된다. 대중은 독특한 그림에 열광했고 그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작품 값이 비싼 화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한국화단의 독보적 거목인 천 화백의 별세 소식이 어제 뒤늦게 알려졌다. 미국 뉴욕의 자택에서 천 화백을 돌보던 큰딸 이혜선 씨가 인터뷰에서 “어머니는 2003년 뇌출혈로 쓰러진 뒤 투병 생활을 하다 올 8월 6일 새벽 잠자는 것처럼 평안하게 돌아가셨다”며 “극비리에 뉴욕의 한 성당에서 조용하게 장례를 치렀다”고 전했다. 서울시립미술관에는 천 화백이 자식처럼 아끼던 작품 93점이 전시 및 보관된 상설전시실과 수장고가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측은 어제 “이 씨가 8월 고인의 유골함을 들고 미술관 수장고를 다녀갔다”고 확인했다.

천 씨는 국내 화단에서 ‘왜색풍’이라고 외면했던 채색화에 아찔한 감각으로 새 획을 그었다. 1952년 부산에서 35마리 뱀을 그린 ‘생태’를 발표해 주목받은 뒤 신명과 한(恨)의 정서가 공존하는 원색의 그림들, 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같은 책을 통해 우리에게 문화의 향연을 선사했다.

노년의 삶은 1991년 ‘미인도’ 위작 사건으로 소용돌이에 빠지기도 했다. 10·26사태 이후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집에서 압류돼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미인도’를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논란의 중심에 섰던 것이다. 이후 1998년 큰딸이 사는 미국행을 택했고 뇌출혈로 거동을 못하면서 사망설까지 나돌았다.

그는 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무얼 한 가지 옹골지게 하는 여자라면 팔자가 세다고 하는데 그게 뭐가 나빠요. 재능도 없으면서 젠체하는 사람이 꼴불견이지.” 소설가 박경리는 오랜 지기인 천 화백에 대해 ‘용기 있는 자유주의자/정직한 생애/그러나/그는 좀 고약한 예술가다’라고 시를 썼다. 남다른 삶의 무게와 여자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 화가이자 문화계의 슈퍼스타. 화려했으나 고독했던 그 여정은 한국미술사에서 ‘슬픈 전설의 91페이지’로 남게 됐다. 그 치열했던 예술혼을 기리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