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천경자 씨는 타고난 예술가였다. 미술에 대한 천부적 재능뿐 아니라 생각도 행동도 유별났다. 부모 반대를 무릅쓰고 17세 때 일본 유학을 떠났으며, 방학 때면 요란한 옷차림으로 나타나 어머니는 기차역에 마중을 갈 수 없었다. 그의 작품세계는 꽃과 여인을 테마로 그린 강렬한 채색화로 상징된다. 대중은 독특한 그림에 열광했고 그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작품 값이 비싼 화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한국화단의 독보적 거목인 천 화백의 별세 소식이 어제 뒤늦게 알려졌다. 미국 뉴욕의 자택에서 천 화백을 돌보던 큰딸 이혜선 씨가 인터뷰에서 “어머니는 2003년 뇌출혈로 쓰러진 뒤 투병 생활을 하다 올 8월 6일 새벽 잠자는 것처럼 평안하게 돌아가셨다”며 “극비리에 뉴욕의 한 성당에서 조용하게 장례를 치렀다”고 전했다. 서울시립미술관에는 천 화백이 자식처럼 아끼던 작품 93점이 전시 및 보관된 상설전시실과 수장고가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측은 어제 “이 씨가 8월 고인의 유골함을 들고 미술관 수장고를 다녀갔다”고 확인했다.
천 씨는 국내 화단에서 ‘왜색풍’이라고 외면했던 채색화에 아찔한 감각으로 새 획을 그었다. 1952년 부산에서 35마리 뱀을 그린 ‘생태’를 발표해 주목받은 뒤 신명과 한(恨)의 정서가 공존하는 원색의 그림들, 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같은 책을 통해 우리에게 문화의 향연을 선사했다.
그는 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무얼 한 가지 옹골지게 하는 여자라면 팔자가 세다고 하는데 그게 뭐가 나빠요. 재능도 없으면서 젠체하는 사람이 꼴불견이지.” 소설가 박경리는 오랜 지기인 천 화백에 대해 ‘용기 있는 자유주의자/정직한 생애/그러나/그는 좀 고약한 예술가다’라고 시를 썼다. 남다른 삶의 무게와 여자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 화가이자 문화계의 슈퍼스타. 화려했으나 고독했던 그 여정은 한국미술사에서 ‘슬픈 전설의 91페이지’로 남게 됐다. 그 치열했던 예술혼을 기리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