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프레트 빌케 전 베를린자유대 교수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빌리 브란트가 이끄는 사민당 정부는 ‘접근을 통한 변화’라는 기치 아래 동방정책을 추진했다.
소련 개혁·개방의 전도사인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등장하자 콜은 정상외교를 강화했다. 라인 강변에서 콜은 고르바초프에게 “역사는 강물처럼 멈추지 않는다. 당신이 막더라도 강물이 다른 길로 바다에 이르듯이 독일 통일과 유럽 통합은 분명히 올 것”이라고 말했다. 고르바초프의 독일 통일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는 계기였다. 고르바초프는 정상회담 이후 서독과 소련의 냉전이 끝났다고 선언했다. 고르바초프의 국내 정치적 입지를 지원하기 위해 서독은 1990년 5월 수십억 달러의 신용차관을 제공했다. 통일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
이런 노력으로 미국은 확고한 독일 통일의 후원세력이 됐다. 서독은 통일에 반대하는 영국과 프랑스를 대상으로도 유럽통화제도 도입과 함께 신속한 유럽통합을 약속했다. 독일 마르크화의 희생을 무릅쓰고 통일의 길을 열어 나간 것이다. 콜의 통일외교는 친서방 정책으로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확보하고 소련과의 협력외교를 병행해 통일 독일에 대한 거부감을 완화한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한국은 미국과의 튼튼한 안보 동맹을 기축으로 하면서 중국과 신뢰를 구축하고, 역내 국가들의 한반도 통일 지원 분위기 조성에 주력하고 있다. 미국과는 동맹 지속, 중국과는 경제관계 개선, 일본과는 안보 위협 상황 개선이라는 통일 편익을 강조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9월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 전승절 행사에 참석해 한중 우호관계를 대외에 과시했다. 이어 중국 경사론에 대한 우려를 해소하고 한미동맹을 공고화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다. 이런 통일외교는 독일 통일을 이끌었던 서독의 노력과 유사하다.
통일 기반의 초석을 쌓은 브란트 총리가 독일 통일 당시 “이제 하나가 되어 공동성장할 때”라고 했던 것처럼 통일외교가 결실을 맺어 한반도가 통일되는 날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