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훈 수석 논설위원
2005년 9월 7일 노무현 대통령은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영수회담을 했다. 노 대통령이 불을 지핀 ‘대연정론’을 둘러싼 담판이 주요 의제였다. 지역 대결 구도를 극복할 수 있는 선거제도만 받아주면 대통령 권력을 내각제 수준으로 넘기겠다는 제안이었다. 노 대통령이 “한번 내각을 맡아서 해보라”고 하자, 박 대표는 “앞으로 아예 그런 말씀 꺼내지 말라”고 단호하게 잘랐다.
노무현 對 박근혜 회담
당시 영수회담의 득실은 분명했다. 박 대표는 달변의 노 대통령을 상대로 실정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기 싸움에서 지지 않기 위해 평소 애용하던 수첩도 회담장에 들고 가지 않았다. 이후 대연정론은 힘을 잃었고, 박 대표는 강인한 지도자의 이미지를 굳혔다. 김대중 정부 때인 2001년 이후 4년 만에 이뤄진 영수회담의 승자는 박 대표였다.
영수회담은 권위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대통령과 야당 대표의 단독회담이라는 표현이 정확하다. 지금은 여당 총재를 겸하던 대통령이 오너 지위의 야당 대표와 밀담하던 시절이 아니다. 노 대통령은 “나는 행정부의 수반이지 여당의 영수가 아니다”라며 영수회담에 거부감을 보인 사실상 첫 집권자다.
고 박정희 대통령은 야당의 역대 대표와 예외 없이 영수회담을 했다. 중앙정보부의 공작정치가 횡행하던 시절이라 회담이 끝나면 ‘사쿠라 논쟁’도 벌어졌다. 김영삼 대통령은 10차례, 김대중 대통령도 7차례 야당 대표와 만났다.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 때도 2, 3차례 빈손회담을 했다. ‘3김 시대의 종언’과 함께 영수회담은 빛이 바랬다.
박 대통령이 야당 대표와의 독대를 꺼리는 이유는 구시대적 이미지를 풍기는 영수회담의 잔재를 감안한 탓이 크다. 3자나 5자 회동 뒤에도 야당에서 딴소리가 나오는 판에 단독회담의 위험 부담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특유의 ‘불신 트라우마’도 가세했을 것이다. 대통령과 동렬에 서는 야당 대표에게 남는 장사라는 경험도 작용했을 법하다.
易地思之가 그리 힘드나
대통령과 야당 지도부가 만나면 사이가 더 나빠지는 것이 우리 정치의 전통이 돼버린 것 같다. 박 대통령도 야당 대표 시절인 2005년 1월 19일 신년기자회견에서 ‘정쟁 없는 정치’를 위해 여야 영수회담을 제안한 바 있다. 권력을 쥔 사람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정치’를 잘 하지 않는다. 아쉬운 게 없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그제 “대표님들 아들딸이라고 생각하고…”라며 청년 일자리를 위한 개혁법안 처리를 간곡하게 당부했다. “양보는 권한이 있는 여당이 하는 것이지 야당은 양보할 것이 없다.” 국회선진화법이 없던 시절 야당 대표이던 박 대통령의 말이다. 지금 야당은 무소불위다. ‘역사 교과서 블랙홀’에서 빠져나오려면 야당 대표의 체면을 세워주는 ‘구시대적인 영수회담’도 필요하면 해야 한다.
최영훈 수석 논설위원 tao4@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