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세경놀이에서 모시는 ‘낭쉐(나무로 만든 소)’.
옛날에 짐진국 대감과 자지국 부인이 백 일 정성을 드리고 아기를 낳았다. 이마에는 해님달님이 양어깨에는 샛별이 박힌 듯한 예쁜 딸이었다. 이름은 자청비라 했다. 하루는 자청비가 베틀에 앉아 노는데 하녀의 손발이 유난히 하얗고 고왔다. 자청비가 그 이유를 물으니, 하녀는 주천강 연못에서 빨래하면 그렇게 된다고 대답했다. 자청비는 당장 주천강에 빨래하러 갔다. 마침 글공부하러 그곳을 지나가는 하늘나라 문도령을 보고 첫눈에 반하여 말을 건넸다. “도련님아, 우리 집에도 꼭 나 같은 남동생이 있는데 함께 가는 게 어떻습니까?” “그렇게 하십시오.” 문도령이 허락하자, 자청비는 곧장 집으로 돌아와 남장(男裝)을 하고서 문도령을 따라나섰다.
문도령과 자청비가 함께 밥 먹고 잠자며 공부한 지 삼 년. 그제야 문도령은 자청비가 여자의 몸이라고 의심했다. “우리 오줌 내갈기기를 해보는 게 어떠냐?” 자청비는 왕대죽순을 잘라다 미리 바지 속에 넣어놓고서 오줌을 내갈겼다. 문도령은 여섯 자 반, 자청비는 열두 자 반. 문도령은 그걸 보고 할 수 없이 의심을 거두었다. 다음 날 아침 문도령이 세수를 하는데 글공부는 그만두고 장가나 가라는 내용의 편지 한 장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문도령으로부터 편지 내용을 들은 자청비. “나도 그러면 글공부 그만하고 가겠다.” 그래서 둘이 서당을 떠나가는데 도중에 자청비가 말했다. “삼 년 글공부를 했는데 몸에 글때인들 안 올랐을까. 목욕이나 하고 가자.” 그렇게 해서 자청비는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밝히고 ‘삼 년 동안 눈 속이던 사랑’을 하룻밤에 애틋하게 풀었다. 이후 문도령은 하늘나라로 올라갔다. 그러나 시간은 무심히 흘렀고 문도령은 돌아오지 않았다.
자청비는 염주 같은 눈물을 흘리며 부모를 영 이별했다. 이제 의지할 곳은 문도령뿐이었다. 자청비는 지상에 물 길으러 온 선녀들의 도움으로 하늘나라로 올라가 문도령을 찾아갔다. “불 위에 칼날 선 다리 놓아 타 나가고 타 들어와야 내 며느리다.” “아, 내 일이여!” 자청비는 피를 흘려가며 며느리 자격시험을 통과하고 이어 하늘나라에 발생한 난을 홀로 평정했다. 여성 영웅으로 거듭난 것이다. 그 후 자청비는 오곡(五穀)을 갖고 인간 세상에 내려와 문도령과 함께 농사의 풍흉을 관장하는 신이 되었고, 정수남은 목축을 관장하는 신이 되었다. 제주도에서 전승되는 구전신화 ‘세경본풀이’의 결말이다. 여자는 힘이 세다고 했던가! 맞는 말이다. 인간의 생사가 ‘그녀’에게 있었나니.
최원오 광주교육대 국어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