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구의 모험/제임스 워드 지음·김병화 옮김/376쪽·1만6000원·어크로스
종이 아닌 가상 메모장 사용하는 요즘 희소해지는 아날로그 감성 떠올리게 해
예술가가 사랑한 문구 이야기도 흥미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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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크레용, 스테이플러, 지우개, 클립 등 형형색색의 온갖 문구들. 저자는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문구의 다양한 면모를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다. 마치 문구에 대한 잡학사전을 읽는 것 같다. 어크로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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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중간 세대인 1990년대 중반 학번이다. 10년 전만 해도 취재수첩과 볼펜을 항상 들고 다녔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실시간으로 클라우드 서버에 글을 저장할 수 있는 메모 애플리케이션(앱)을 사용했다. 자연스레 수첩과 볼펜은 멀어졌다. 그런데 출입처가 긴 학술 논문을 자주 읽어야 하는 곳으로 바뀌고 나서 문방사우(文房四友)는 죽마고우(竹馬故友)로 다시 돌아왔다. 메모 앱에도 ‘하이라이트’ 기능이 있지만 중요한 문장을 따로 표시해 요점을 추리기에는 역시 볼펜과 포스트잇만 한 게 없었다. 인쇄된 종이 위에 빨간색으로 직접 긋고 소위 ‘돼지꼬리’ 정도는 날려 줘야 일할 맛이 나는 건 학창 시절의 오랜 습성 때문일까. 그것은 저자가 책 말미에 언급한 ‘IT 기기로 느낄 수 없는 문구만의 독특한 물리적 경험’과 다름없을 것이다.
이 책은 ‘문구광(狂)에 의한, 문구광을 위한’ 기록이다. 클립부터 볼펜, 종이, 스테이플러, 지우개까지 오로지 문구의 세계만을 다뤘다.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땐 ‘이 흔한 소재로 책을?’이라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기우였다. 저자는 ‘지루함 콘퍼런스(Boring conference)’를 매년 개최하는 괴짜다. 이 대회에서는 재채기를 할 때마다 일일이 강도를 기록하거나 여러 자판기들의 소음을 녹취해 비교하는 사람들이 참가한다.
영국의 ‘딕슨 타이콘데로가’ 연필.
재밌는 것은 유명한 문사(文士)들 중에도 문구광이 꽤 많았다는 사실이다. ‘분노의 포도’를 쓴 미국 작가 존 스타인벡(1902∼1968)은 고급 연필인 ‘블랙윙 602’ 마니아였다. 일반 연필보다 3배나 비쌌지만 그는 작품을 쓸 때마다 블랙윙 602를 고집했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으로 유명한 영국 작가 로알드 달(1916∼1990)도 아침마다 ‘딕슨 타이콘데로가’ 상표의 연필을 여섯 자루 정도 깎은 뒤에야 집필에 들어갔다고 한다. 스타워즈의 감독 조지 루커스도 이 연필로 시나리오 초고를 썼다.
자출족(자전거 출퇴근족)이 자주 쓰는 격언에 ‘잔차(자전거)는 엔진(다리 힘)이 생명’이라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글쓰기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의 집중력이지 필기도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문구광들의 생각은 좀 다른 듯하다. 앞서 스타인벡이 흠뻑 빠졌던 블랙윙 602는 요즘 이베이에서 한 자루에 3만∼4만 원에 거래되고 있다. 해당 제조사가 문을 닫아 희소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정한 문구광들은 이 비싼 연필을 수집하려는 게 아니라 직접 쓰기 위해 구입한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