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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전승훈]렌치 총리의 ‘리소르지멘토’

입력 | 2015-10-26 03:00:00


전승훈 파리 특파원

‘리소르지멘토(Il Risorgimento)’. 19세기 이탈리아 반도에서 불길처럼 퍼져 나갔던 통일운동을 말한다. 시칠리아 왕국, 사르데냐 왕국, 나폴리 왕국, 로마 교황령과 밀라노 베네치아 등 수많은 도시국가로 분열돼 있던 이탈리아는 1861년에서야 통일될 수 있었다.

이렇듯 문화와 역사가 다른 국가들이 통합된 이탈리아는 통일왕국 건설 당시부터 지방분권과 중앙집권에 대한 오랜 논쟁이 있었다. 지금도 이탈리아는 부유한 북부와 가난한 남부 사이에 경제 격차가 심하다. 우익 정당인 ‘북부동맹’은 부유한 롬바르디아 지역의 독립을 주장한다.

이탈리아의 중앙집권적 체제에 대한 반감은 국가 파시스트당을 창설해 1922년부터 1943년까지 21년간 총리를 지냈던 베니토 무솔리니의 처형 후 극대화됐다. 무솔리니는 독일의 히틀러와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주범으로 체포돼 총살당했다. 전후 이탈리아 정치권은 다시는 독재자가 출현할 수 없도록 상하 양원의 동의 없이는 법률도, 예산안도, 총리 임명도 통과될 수 없게 만드는 정치 시스템을 고안해냈다. 특히 헌법 개정안은 상하 양원을 각각 두 번씩 통과한 후 국민투표까지 거쳐야 하는 3중, 4중의 견제장치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나친 견제장치는 전후 69년 동안 총 63번의 정권교체가 벌어질 정도로 정국 불안을 심화시켰다. 이탈리아 정치권은 상원과 하원, 중앙과 지방정부, 좌파와 우파, 집권연정 내 다수당과 소수당이 서로 대립하고 싸우면서 사분오열돼 갔다. 특히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각국에서 창의적이고 신속한 경제개혁 정책을 펼쳤지만 이탈리아는 고비용 저효율의 복잡한 의회 권력에 발목을 잡혀 번번이 개혁에 실패했다.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지배할 수도, 개혁할 수도 없는 나라’라는 이미지로 굳어졌다.

이 때문에 지난해 2월 취임한 마테오 렌치 총리(40)는 제2의 이탈리아 통일운동인 ‘리소르지멘토’의 기수를 표방하고 나섰다. 그는 올해 세 가지의 굵직한 정치개혁법안을 통과시켰다. 모두 복잡하게 분열된 이탈리아 정치 시스템을 단순화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법안이다. 집권당의 안정적 과반 의석 확보를 위해 선거법을 개혁해 40% 이상을 득표한 정당은 55%의 의석을 차지할 수 있도록 해주고, 중앙과 지방정부의 권한을 명확히 구분해 국가적 인프라 건설의 경우 중앙정부에 배타적 권한을 집중시켰다. 특히 상원의원 수를 70%나 줄이는 개헌안 통과는 백미였다.

렌치 총리는 자신의 일련의 정치개혁안을 ‘이탈리쿰(Italicum)’이라고 명명했다. 지난 10년 동안 높은 실업률과 재정적자에 허덕이고 있는 이탈리아를 긴 잠에서 깨우는 정치개혁안이란 의미에서 이름을 붙였는데 병든 소녀가 구원받는다는 성서 속 ‘탈리타쿰’ 이야기에서 따온 것이다.

한국 정치권의 고비용 저효율은 이탈리아 국회에 버금갈 정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서 노동자 평균임금 대비 국회의원 연봉은 이탈리아가 4.95배, 한국이 4.19배로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준이다.

그런데 이제 이탈리아 국회는 상원이 스스로의 밥그릇을 내놓는 개혁안을 통과시켰는데도 한국 국회는 오히려 의원 수를 늘릴 궁리를 하고 여야가 내년 총선을 위한 선거구 획정에도 합의하지 못하고 있다.

렌치 총리는 “지금 이탈리아가 필요로 하는 것은 정치인 수를 줄이고 정책을 늘리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치권부터 뼈를 깎는 구조개혁에 솔선수범하지 못한다면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한 노동개혁, 복지개혁도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이 오늘날 유럽이 주는 교훈이다.

전승훈 파리 특파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