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 피고인 늘어나도 수준이하 통역에 법정 한숨
22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부장판사 심규홍) 심리로 열린 ‘이태원 살인사건’ 2차 공판준비기일에서 피고인 아서 존 패터슨(36)은 치통을 호소했다. 하지만 그의 진술은 통역 과정에서 “구치소에서 진통제를 줄 수 있다고 하더라”는 취지로 옮겨졌다. 그의 어투에 배어있는 불편함과 절박함은 통역의 차분한 어조로 재판부에 전달됐다.
말투, 표정, 몸짓…. 작은 단서 하나로도 형사법정에 선 피고인의 유죄와 무죄가 갈리고 인생이 뒤바뀐다. 경찰청이 집계한 지난해 외국인 범죄 건수는 3만671건으로 2012년 2만4373건에 비해 25.8%가 늘었다. 한국말이 서툰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 피고인들이 재판에 넘겨지고 있지만 이들의 말을 제대로 옮겨 줄 통역 자원은 충분히 확보돼 있을까. ‘박근혜 대통령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일본 산케이신문 가토 다쓰야 전 서울지국장(49) 등 사회적 이목을 끄는 외국인 피고인 재판이 늘면서 법정 통역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지만, 원활치 못한 법정 통역으로 공정한 재판이 이뤄지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경제 범죄, 군사기밀 관련 범죄 등 전문적이거나 복잡한 사건이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최근 방산비리 혐의로 기소된 이규태 일광공영 회장 재판에서는 외국인 증인 신문 과정에서 군사용어와 약어가 난무하자 영어 통역인이 통역을 수시로 중단했다. 검찰 수사 단계에서부터 함께한 베테랑 통역인임에도 검찰과 변호인은 “통역이 제대로 안되고 있다”며 항의했다. 지난해 CNK 주가조작 사건에서는 통역인을 중간에 해촉하고 교체하는 일도 있었고, 주심 판사가 조서를 일일이 맞춰보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외국인 피고인들의 방어권 보장에 대한 우려가 나온다. 대법원 통계에 따르면 외국인 관련 형사재판은 2012년 3249건에서 2013년 3564건, 2014년 3790건으로 꾸준히 늘고 있으나 통역 인력이 충분치 않아 ‘내 의견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 아니냐’는 피고인들의 두려움은 쉽게 해소되기 어렵다. 공판조서는 진술 요지만 남기기 때문에 통역인이 간추려 전달하는 일이 잦아지면 사소해 보이지만 진실 규명에 결정적인 단서들을 놓치기 쉽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미묘한 뉘앙스, 욕설까지도 그대로 옮기라”고 주문하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 외국인 전담 재판부에서 근무했던 한 부장판사는 “통역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데 (피고인이) 뭔가 길게 설명해도 (통역이) 짧게 전달할 때마다 ‘내가 제대로 심리하고 있는 게 맞을까’ 하는 불안감이 생겼다”고 털어놓았다.
지난해 성폭행 혐의로 기소된 한 외국인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한 재판장은 “한참 판결 요지를 설명한 뒤 피고인이 울고불고하길래 통역을 기다렸는데 통역인이 ‘판사님, 이 사람이 그렇게 긴 시간 동안 감옥에 있을 수 없다는데요?’라고 말해 힘이 빠졌다”고 전했다.
법정 통역인은 최초 30분은 7만 원, 이후는 30분 단위로 5만 원씩 통역료를 받고 있다. 법원 안팎에선 “보수를 높이는 것도 방법이지만 법정 통역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게 급선무”라는 목소리가 높다.
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