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지 ‘사회와 역사’ 가을호
무직 양반을 부랑자로 단속한 소식을 전한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1914년 11월 20일자 기사. 한국언론진흥재단 자료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1914년 11월 20일자 기사 ‘남부에도 부랑 취체(取締)’ 중 일부다. 요즘의 노숙인과 비슷한 의미로 쓰이는 ‘부랑자’에 양반이 포함돼 있어 눈길을 끈다. 예지숙 서울대 국사학과 박사는 최근 발간된 사회사학회 학술지 ‘사회와 역사’ 가을호에 실은 논문 ‘일제시기 조선에서 부랑자의 출현과 행정당국의 대책’에서 “일제는 강점 초기 정치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양반과 상류층 자제를 부랑자로 잡아들였다”고 말했다.
구한말 양반은 항일 의병의 구심이었고, 1910년 강제병합 이후에도 향촌에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예 박사는 “1910년대 일제는 조선의 길거리나 공원이 아니라 기생집, 연극장, 여관 등 유흥가에서 부랑자를 단속해 무뢰배와 걸인뿐 아니라 옛 대한제국의 관료, 양반 청년 유생들을 붙잡았다”며 “일제는 총독정치에 비판적인 양반들을 압박하기 위한 차원에서 부랑자 단속을 활용했다”고 말했다.
사회와 역사 가을호는 이 논문을 포함해 ‘식민지 조선의 사회적 배제와 소수자’ 특집을 실었다. 이종민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 전문연구원은 ‘가벼운 범죄·무거운 처벌―1910년대의 즉결처분 대상을 중심으로’에서 “식민화 이후 원래 범죄와 비(非)범죄의 경계선에 있던 행위들이 대거 ‘경범죄’ 목록에 올라 처벌 대상이 됐고, 붙잡힌 이들은 방어권도 없었다”며 “3·1운동으로 태형이 폐지되기 전에는 태형을 받고 사망하거나 부상한 사람이 속출했다”고 말했다.
소현숙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HK연구교수는 ‘식민지 시기 불량소년 담론의 형성’에서 “일제는 경찰과 법으로 일상을 통제하면서 부랑, 구걸, 미성년 음주 등 광범위한 행위를 불량행위로 규정하고 ‘불량소년’을 단속했다”며 “그러나 감화원과 소년형무소에 수감됐던 소년들은 대부분 빈궁한 부랑아나 고아들이었다”고 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