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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김희균]답이 없다면

입력 | 2015-10-27 03:00:00


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기자들이 한 부처를 몇 년 담당하다 보면 흔히 저지르기 쉬운 실수가 있다. 정부가 어떤 정책을 내놓았을 때 ‘이거 예전에 다 나왔던 얘기야’ ‘그거 새로운 정책 아니야’라는 식으로 흘려 넘겨버리는 경우다.

같은 정책이라도 과거 발표됐을 당시와 환경이나 정책 수요가 달라졌다면 새롭게 다룰 가치가 있다. 그런데 무심히 지나쳤다가 다음 날 아침 다른 신문들을 보며 무릎을 치는 일이 종종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흔한 경우는 그야말로 재탕삼탕식 정책이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과거 정책을 우려먹는 상황 말이다. 최근 나온 학제 개편 논의가 대표적이다.

새누리당은 21일 당정협의에서 “정부의 저출산 대책이 백화점식 나열”이라고 비판하면서 난데없이 학제 개편 카드를 꺼냈다. 새누리당의 논리는 취업을 빨리하면 출산율도 높아질 테니 초등학교 입학 연령을 낮추고, 현재 각각 6년인 초등학교와 중고교 재학 기간을 각각 5년으로 줄이자는 것이다.

교육부는 이날 당정협의에 참석 요구조차 받지 못했다. 새누리당이 주무부처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저출산 대책이라며 학제개편안을 툭 던진 것이었다. 교육부는 온라인 속보를 보고서야 해당 내용을 알게 되는 촌극이 벌어졌다. 그때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바로 “이거 참여정부 때도, 이명박 정부 때도 다 나왔던 얘기야. 새로운 정책 아니야”였다.

2005년 9월, 참여정부 당시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은 산업 수요와 학생의 성장 발달에 맞춰 ‘6(초)-3(중)-3(고)-4(대)’의 학제를 ‘5-3-4-4’로 바꾸자며 학제 개편을 공론화했다. 2009년 11월, 이명박 정부는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를 통해 저출산 극복 방안으로 초등학교 취학 연령을 1년 앞당기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학제 개편이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재학 기간만 바꿔서 될 일이 아니다. 군 문제, 재정 문제, 대학 입시 문제 등 함께 바꿔야 할 것이 많다. 교육 전문가들이 정책연구, 여론수렴, 관련법 개정 등에 10년 이상이 걸릴 거라고 하는 점을 감안하면 너무 설익은 발표들이었다.

새누리당이 정부의 저출산 대책을 백화점식이라고 비판한 대목이 이해가 가지 않는 바는 아니다. 정부가 19일 내놓은 제3차 저출산 종합대책 중 하나는 무주택 예비부부와 신혼부부를 위한 전세자금 지원 확대다. ‘집은 사는(Buy) 것이 아니라 사는(Live) 것’이라는 주거 안정 캐치프레이즈가 ‘집은 사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라고 변질될 정도로 주택 문제는 심각하다. 그러나 실제로 전세자금 지원이 출산으로 이어질까 생각해보면 고개가 가로저어진다. 일단 시중에 전세물량 자체가 동난 데다 일단 빚을 내 집을 구한 뒤에는 대출을 갚기 위해 오히려 출산을 늦출 가능성이 높다.

사교육이나 저출산이나 엄청난 난제임에 틀림없다. 과연 답이 있기는 한지 의구심이 들 정도다. 하지만 답을 찾기 어려울수록 과거 정책이 실패하거나 무산된 이유를 짚어가며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시험공부를 할 때 오답노트를 잘 만들어야 하는 것과 같다.

당정이 저출산을 해결하기 위해 뭐라도 내놓는 것을 나무랄 일은 아니다. 하지만 새누리당이 내놓은 학제 개편 방안은 일단 질러보고, 아니면 말고 식이다. 비판이 고조되자 새누리당 스스로 “당장 하자는 것은 아니다”라고 발을 뺐다. 학제 개편처럼 민감하고 복잡한 사안에 대해 사전 논의나 정책연구 없이 불쑥 나서는 것은 곤란하다. 양치기 소년이 아무리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쳐봤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것과 같은 결과를 자초할 수 있다.

김희균 정책사회부 차장 foryo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