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예술로 승화한 소설가와 화가… 딸들로 이어진 2代교류 국민적 화가의 장례식도 안 치른 맏딸의 기행… 유족 간 불화 정부는 일생의 노작 사회 환원한 화가에 합당한 예우를 추서해야
황호택 논설주간
인터뷰 중에 화가 천경자 씨의 이야기가 나왔다. 박 씨는 “치매에 걸려 미국 딸집에 가있다”며 안타까워했다. 박 씨가 ‘천경자를 노래함’이라는 시에서 “명동시절에는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했다”고 회고했을 만큼 둘 사이는 자매처럼 가까웠다.
천 씨는 박 씨에게 예술가로서의 고뇌와 개인사의 고통스러움을 털어놓을 때가 많았다. 몇 시간씩 혼자서 이야기했다. 박 씨는 ‘천경자를 노래함’에서 “그의 언어를 시적(詩的)이라 한다면 속된 표현. 아찔하게 감각적”이라고 썼다. 천 씨는 수필집도 여러 권 남겼다.
박 씨는 천 씨에게서 받은 그림을 여러 점 갖고 있었지만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한번은 화원 주인이 와서 집의 나무들을 예쁘게 전지해 주자 “이쁜 그림”이라며 천 씨의 그림을 선물로 주었다는 것이다.
천 씨의 맏딸 이혜선 씨(70)는 김 씨를 만나러 토지문화관에 온 적도 있었고 뉴욕에서 가끔 전화를 걸어 몇 시간씩 통화도 했다. 모전여전(母傳女傳)이었다. 박경리와 천경자, 김영주와 이혜선. 어머니에서 딸로 이어지는 2대(代)의 이야기를 들으며 두 예술가의 성정(性情)이 딸들에게 그대로 대물림한 것이 신기했다.
뇌졸중을 맞아 의식을 잃은 천 씨가 병원에 있다 집으로 옮긴 뒤에는 의사와 물리치료사가 정기적으로 방문해 돌봤다. 그런데 딸이 박 씨 이야기를 해주자 어머니의 얼굴에 반응이 있었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이 씨가 김 씨를 찾아와 “민중예술파들이 서울시립미술관에 있는 어머니의 전시실을 철거하라고 요구한다”며 분노했다. 민중미술 작가들이 “그게 그림이냐”고 힐난하며 공간을 독점하고 있다고 비난했다고 한다. “이 씨는 어머니와 관련된 일이라면 싸움닭처럼 덤볐다”고 김 씨가 전했다.
이 씨가 어머니의 유골을 들고 두 달 전에 한국을 다녀갔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화가와 그의 그림을 사랑한 사람들은 물론이고 다른 유족에게서도 분노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다른 유족들은 합동기자회견을 열어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연락도 안 했고 유골이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른다”고 토로했다.
대리인을 맡은 배금자 변호사는 “이혜선 씨가 고흥군에 기증했다가 돌려받은 그림을 비롯해 어머니의 유작과 유산을 많이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가족들은 그림이나 재산 분배 요구를 하지 않겠다고 공언하며 롯데가(家) 같은 재산분쟁으로 비치는 것을 극력 꺼렸다. 대표작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함으로써 일생의 노작을 사회에 환원했는데도 정부가 금관문화훈장도 추서하지 않는 것은 서운하다고 호소했다.
이 씨가 어머니의 장례식도 치르지 않고 서울시립미술관을 몰래 다녀간 것은 가족들과의 불화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국민적인 사랑을 받던 화가가 가족과 지인 그리고 그의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마지막으로 작별하는 의식도 치르지 못했으니 다른 유족들로서는 아픔이 컸을 것이다.
천경자는 삶도 죽음도 평범하지 않았던 천재 예술가로 기억될 것이다. 맏딸의 기행(奇行)과 집착은 그저 에피소드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