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도’에서 혜경궁 홍씨로 출연한 문근영.
그로부터 딱 10년이 지난 지금도 칼럼의 지적은 여전히 유효하다. 배우 문근영은 아직도 국민 여동생이라는 저주스러운 자장(磁場)으로부터 탈출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영화 ‘사도’에서도 그녀는 그러했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은 뒤 왕위에 오른 정조(소지섭)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문근영)의 회갑연에서 회한의 부채춤을 추는 마지막 장면을 두고 “지루하다”는 관객 반응이 많았던 것도 문근영에게 적잖은 원인이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60세를 맞아 머리에 하얀 서리가 내리고 얼굴이 쭈글쭈글해진 노파로 문근영이 등장해 만감이 교차하는 서글픈 미소를 짓는데, ‘할머니 문근영’에 도무지 몰입이 되지 않은 나는 순간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올해로 28세인 문근영은 지금도 소녀와 여자 사이에 낀 채 진공상태로 둥둥 떠 있는 것만 같다. 그녀를 볼 때마다 난 할리우드 아역배우로 이름을 날렸던 다코타 패닝이 떠오른다. ‘아이 엠 샘’(2001년), ‘우주전쟁’(2005년)에서 깨물고 싶을 만큼 앙증맞은 모습으로 ‘연기 천재’란 칭찬을 한 몸에 받은 다코타 패닝은 이제 21세가 되었지만 그녀를 성공시킨 과거의 덫에 걸려 있다. 13세 나이에 발랑 까진 소녀로 각각 ‘레옹’(1994년)과 ‘킥 애스: 영웅의 탄생’(2010년)에 출연한 내털리 포트먼과 클로이 머레츠가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오히려 훨씬 넓고 상상력 넘치는 행보를 보이고 있음을 감안하면, ‘귀요미’로 성공한 어린 여배우들은 동서양을 불문하고 성인 연기자로 변신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님을 알게 된다.
더욱 걱정되고 안타까운 일은, 문근영을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았던 그녀의 행위와 능력과 업적과 이미지 중 2015년 현재에도 여전히 경쟁력을 지닌 부문은 별로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귀요미’로는 올해 스물다섯 살인 박보영이 있고, ‘기부천사’로는 목숨 걸고 기부하는 김장훈과 션이 있으며, ‘학벌 좋은 연예인’으론 드라마에 나와 혼수상태라며 입 다물고 눈 감고 가만히 누운 채 발가락만 보여줘도 시청률이 오르는 김태희가 있는 것이다(게다가 문근영은 2006년 성균관대 입학 후 아직도 졸업을 하지 못했다).
전도연은 26세 때 출연한 ‘해피 엔드’(1999년)로 다시 태어났고, 김혜수는 34세에 출연한 ‘얼굴 없는 미녀’(2004년)를 통해 연기의 한계를 멋지게 극복했다. 일정한 기울기를 가진 사선 모양으로 조금씩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알을 깨고 나오듯 또는 허물을 벗듯 훌쩍 커버리는 계단식 성장을 하는 게 배우이다. 그래서 배우에겐 점진적 변화란 없으며 오로지 도전과 파격만이 예술가로서의 일상인 것이다.
뛰어난 연기력과 외모를 가졌으면서도 정체상태에 있는 문근영에게 욕먹을 각오하고 다시 10년 만에 나는 요구한다. ‘근영아, 어서 야해져라.’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