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세대갈등 몸살]<2>내집 마련 포기한 청년층
지난달 16일 영국 런던 사우스켄싱턴에서 만난 로버트 픽스톤 씨(30)는 집 얘기가 나오자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는 33m²짜리 원룸에 침대 2개를 들여놓고 친구와 같이 살고 있다. 소셜미디어 회사인 이미디잇 퓨처사의 컨설턴트로 일하는 그는 약 3만 파운드(약 5225만 원)의 연봉을 받아 30% 정도를 월세로 쓴다. 수도료, 전기료 등 각종 공과금을 감안하면 연봉의 40% 이상이 주거비다. 동년배 중 연봉이 낮은 편은 아니지만 다달이 연금보험료, 학자금 대출 상환금까지 내고 나면 살림이 빠듯하다. 당연히 주택 구입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픽스톤 씨는 “미래가 나아질 것 같지 않다”며 한숨을 쉬었다.
영국 런던에선 중장년층 집 소유주들이 임대주택을 고급 주택으로 바꾸면서 젊은이들이 외곽으로 내몰리고 있다. 런던=손영일 기자 scud2007@donga.com
영국에서 집은 세대 간 빈부격차를 심화시키는 주된 원인이다. 1980년대 이후 30년간 이어진 주택 가격 상승은 집 소유주들에게 ‘축복’이었다. 자산 가치가 높아져 손쉽게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비싼 월세를 받아 안정된 노후소득을 마련했다.
하지만 젊은이들에겐 집값 상승이 ‘재앙’이었다. 29일 현재 영국의 평균 집값은 25∼34세 연평균 소득의 7배 수준이다. 월세 가격 폭등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일을 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워킹 푸어’로 전락했다.
집값에 신음하는 영국 청년들의 모습은 한국과 몹시 닮아 있다. KB국민은행에 따르면 9월 말 현재 서울의 아파트 평균 매매 가격은 3.3m²당 1702만 원이다. 전용면적 84m² 아파트를 사려면 4억3300만 원이 넘게 든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발표한 올해 대졸 신입사원의 초봉은 월 290만9000원(세전)이다. 신입사원이 세금을 내지 않은 상태에서 13년간 월급을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겨우 평균치의 집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두 나라만의 현상이 아니다. 세계 각국에서 청년 세대가 혼자만의 힘으로 집을 사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됐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2만3000유로(약 2875만 원)의 집을 산 한 30대 회사원은 집값의 절반가량인 1만1000유로(약 1375만 원)를 부모, 할머니, 심지어 삼촌으로부터 지원받았다. 그의 삼촌은 “가족들이 지원해 주지 않으면 젊은이들은 밀라노에서 집을 못 산다”고 말했다.
○ 주택정책 세대별로 평가 엇갈려
독일인들은 과거에 주택 소유 비율이 낮았다. 월세가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굳이 집을 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 초저금리 기조와 이민자 확대 추세가 이어지면서 집을 사는 사람들이 늘었다. 특히 대도시 지역은 버블이 우려될 정도로 집값 상승폭이 크다. 최근 대도시에서 집을 구입한 크리스티안 벨레르트 씨(43)는 “집값이 오르면 노후에 매각해서 현금을 많이 보유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 일부러 대도시에서 집을 샀다”고 말했다.
친척에게 돈을 빌려 집을 산 20대 이탈리아인은 “은행에서 젊은 사람들에게 주택 융자를 잘 해주지 않는 데다 정부가 주택 거래에 많은 세금을 부과한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정부의 주택정책을 바라보는 세대 간 시각은 엇갈린다. 청년 세대들은 현재 집값이 비정상적으로 비싸다고 보는 반면 기성세대들은 내심 정부가 계속 집값을 부양해 주기를 바란다. 청년 세대가 주거 목적으로 주택 구매를 원하는 반면 기성세대 중 상당수는 주택을 투자자산으로 보기 때문이다. 마르코 바그너 코메르츠방크 이코노미스트는 “노년층이 주택에 대한 투자를 늘리면서 거주 목적으로 집을 사려는 청년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수석전문위원은 “주택 가격이 하락해 담보 가치 이하로 내려가면 아파트 한 채가 유일한 자산인 중산층이 몰락할 수 있다”며 “경제 전체를 흔들 수 있는 사안인 만큼 정부가 나서서 집값을 낮추는 정책을 펼치는 것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주택 소유자 중 상당수가 투표에 적극 참여하는 중장년과 노년층이어서 대부분 정부는 주택경기 부양책에 드라이브를 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 청년 세대 주거비 부담을 줄여야
‘내 집 마련’에 실패한 청년 세대는 기성세대에 집을 빌릴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일부 선진국은 월세 인상을 규제해 청년 세대들의 주거비용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고 있다. 독일은 주택 가격에 비해 임대료가 적게 변한 국가 중 하나다. 베를린의 월세 상승률은 2010년 1분기(1∼3월) 대비 2015년 1분기에 6.1% 증가에 그쳤다. 독일 정부가 월세를 과도하게 올리지 못하도록 제도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집주인이 가이드라인 격인 ‘표준 임대료’에서 과도하게 벗어난 월세 인상을 요구하면 형법에 따라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벌금형에 처해진다. 또 미국 영국 일본은 주택 임대소득에 대해 최고 40∼45%의 중과세를 하고 있다.
일각에선 월세 가격 규제는 임시방편일 뿐 주택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청년들이 집을 살 수 있도록 주택 공급을 늘리거나 과도한 부동산 가격 거품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정부 정책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영국의 시민단체인 ‘세대 간 재단’ 리즈 에머슨 대표는 “집이 없으면 청년들이 가정을 꾸리길 기피하고 결국 심각한 저출산 현상으로 이어진다”며 “정부도 노년층 표만 의식하지 말고 청년들이 안정된 주거환경을 꾸리도록 정책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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