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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후 사명대사가 일본서 쓴 친필 漢詩 빛 보다

입력 | 2015-10-30 03:00:00

재일동포 사학자 故신기수씨 부인 본보에 공개




《사명대사 유정.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으로 활약하며 평양성 탈환과 의령, 울산, 순천 전투 등에서 큰 공을 세웠고,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적진에서 만나 강화 담판을 벌이기도 했다. 전쟁 후엔 선조의 명으로 일본에서 새로운 권력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만나 포로로 끌려갔던 조선인 3000여 명을 처음으로 송환해 온 것도 그였다. 그래서 그는 위인의 반열에 올랐다.》

사명대사가 1604년 가을 일본 쓰시마 섬에서 쓴 5언절구.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회담을 앞두고 외로운 산사에 내리는 가을비 소리를 들으며 근심이 깊음을 표현했다. 강학자 씨 제공

사명대사가 도쿠가와를 만나기 전에 쓴 5언절구의 한시가 공개됐다. 시는 조선통신사 연구로 일가를 이룬 재일동포 사학자 고 신기수(辛基秀·2002년 작고) 씨가 생전에 수집한 ‘신기수 컬렉션’(140여 점)에 들어 있다. 도쿄에 살고 있는 신 씨의 부인 강학자 씨는 이 자료의 존재를 알게 된 기자가 “올해가 한일수교 50년이고, 한일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조선과 일본의 화해 과정에서 나온 대사의 글씨를 보고 싶다”고 요청하자 28일 사진을 찍어 보내왔다.

시는 가로 27cm, 세로 44cm의 종이에 쓰여 있고 종이는 비단 위에 붙어 있다. 마지막에는 ‘松雲書(송운서)’라고 쓰고 낙관을 찍었는데, ‘송운’은 대사의 또 다른 호. 일본에서는 ‘사명대사’보다 ‘송운대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글의 내용은 이렇다.

‘遠客坐長夜(원객좌장야)/雨聲孤寺秋(우성고사추)/請量東海水(청량동해수)/看取淺深愁(간취천심수)’

글씨는 행서와 초서가 섞여 있는 ‘행초체’로 일반인은 해독이 어렵다. 이 시는 당나라 시인 이군옥(李群玉)이 쓴 ‘우야정장관(雨夜呈長官)’이라는 16행시의 맨 앞 4개 행이다.

‘나그네는 밤새 앉아 잠 못 들고/외로운 절엔 가을 빗소리만/동해물 깊이를 재어보게나/내 근심과 어느 것이 더 깊은지’

사명당 진영(1796년·보물 제1505호·삼베에 채색) 동화사 성보박물관 소장

사명대사가 쓰시마(對馬) 섬에 도착한 것은 1604년 8월. 재일사학자인 강재언 전 하나조노(花園)대 교수에 따르면 대사는 이때 소 요시토시(宗義智) 쓰시마 도주에게 조선 조정의 ‘허화개시(許和開市·화평의 허락과 무역의 재개)’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조선 조정과 쓰시마는 대사와 도쿠가와의 만남에 더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조선은 민간인인 대사를 통해 비공식적으로 전후처리의 방법을 모색하고, 쓰시마는 안정적인 무역을 보장받고 싶었기 때문. 쓰시마 도주는 곧바로 에도(도쿄)에 머물던 도쿠가와에게 대사가 쓰시마에 온 것을 알리고 만나 줄 것을 청했다.

대사가 도쿠가와로부터 ‘교토에 올 때 만나겠다’는 대답을 듣고 교토에 입성한 것이 그해 12월. 이듬해 3월 도쿠가와와 만나 강화문제와 포로송환을 논의하고 4월에 귀국한다. 비록 대사가 직접 지은 글은 아니지만 ‘秋(가을)’라는 글자가 들어간 시를 골랐다는 점에서 이 시는 쓰시마에 머물던 가을경에 도쿠가와의 답변을 기다리며 쓴 것으로 추정된다. 또 이 시가 큰일을 앞두고 근심하고 있는 자신의 심정을 잘 대변하고 있어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대사는 교토에서 회담을 기다리면서도 일본의 고승들과 활발하게 시문을 교환했다. 조선통신사 연구로 여러 권의 책을 낸 나카오 히로시(仲尾宏) 교토조형예술대 객원교수는 “남겨진 자료는 대사의 지식의 넓음, 시문의 탁월함, 박람강기 등이 인상적이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고 했다(‘조선통신사와 그 시대’·공저·2001년).

신 씨는 이 글씨를 1997년 초 교토의 고미술상에게서 구입했다고 한다. 이동국 예술의전당 서예부장은 “경남대에 있는 데라우치 문고에 대사의 편지가 남아 있고, 한국보다는 일본의 개인 소장자들이 친필을 더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제대로 공개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글을 쓴 시점이나 글씨체 등으로 볼 때 소중한 자료”라고 말했다.

“송운대사 유정이 대일교섭의 선구자로서 단신으로 이에야스와 회담에 이른 것의 의미는 크다. 나중에 통신사 왕래의 확실한 실마리가 이 회담을 통해 마련됐던 것이다.” 나카오 교수의 평가다.

전쟁 전엔 존경받는 선승(禪僧)으로, 전쟁 중엔 충성스러운 장수로, 전쟁 후엔 탁월한 외교관으로 활약했던 사명대사. 글씨체와 시에는 그의 세 모습이 모두 어른거린다.

심규선 대기자 kss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