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 사학자 故신기수씨 부인 본보에 공개
《사명대사 유정.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으로 활약하며 평양성 탈환과 의령, 울산, 순천 전투 등에서 큰 공을 세웠고,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적진에서 만나 강화 담판을 벌이기도 했다. 전쟁 후엔 선조의 명으로 일본에서 새로운 권력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만나 포로로 끌려갔던 조선인 3000여 명을 처음으로 송환해 온 것도 그였다. 그래서 그는 위인의 반열에 올랐다.》
사명대사가 1604년 가을 일본 쓰시마 섬에서 쓴 5언절구.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회담을 앞두고 외로운 산사에 내리는 가을비 소리를 들으며 근심이 깊음을 표현했다. 강학자 씨 제공
시는 가로 27cm, 세로 44cm의 종이에 쓰여 있고 종이는 비단 위에 붙어 있다. 마지막에는 ‘松雲書(송운서)’라고 쓰고 낙관을 찍었는데, ‘송운’은 대사의 또 다른 호. 일본에서는 ‘사명대사’보다 ‘송운대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글의 내용은 이렇다.
글씨는 행서와 초서가 섞여 있는 ‘행초체’로 일반인은 해독이 어렵다. 이 시는 당나라 시인 이군옥(李群玉)이 쓴 ‘우야정장관(雨夜呈長官)’이라는 16행시의 맨 앞 4개 행이다.
‘나그네는 밤새 앉아 잠 못 들고/외로운 절엔 가을 빗소리만/동해물 깊이를 재어보게나/내 근심과 어느 것이 더 깊은지’
사명당 진영(1796년·보물 제1505호·삼베에 채색) 동화사 성보박물관 소장
대사가 도쿠가와로부터 ‘교토에 올 때 만나겠다’는 대답을 듣고 교토에 입성한 것이 그해 12월. 이듬해 3월 도쿠가와와 만나 강화문제와 포로송환을 논의하고 4월에 귀국한다. 비록 대사가 직접 지은 글은 아니지만 ‘秋(가을)’라는 글자가 들어간 시를 골랐다는 점에서 이 시는 쓰시마에 머물던 가을경에 도쿠가와의 답변을 기다리며 쓴 것으로 추정된다. 또 이 시가 큰일을 앞두고 근심하고 있는 자신의 심정을 잘 대변하고 있어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신 씨는 이 글씨를 1997년 초 교토의 고미술상에게서 구입했다고 한다. 이동국 예술의전당 서예부장은 “경남대에 있는 데라우치 문고에 대사의 편지가 남아 있고, 한국보다는 일본의 개인 소장자들이 친필을 더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제대로 공개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글을 쓴 시점이나 글씨체 등으로 볼 때 소중한 자료”라고 말했다.
“송운대사 유정이 대일교섭의 선구자로서 단신으로 이에야스와 회담에 이른 것의 의미는 크다. 나중에 통신사 왕래의 확실한 실마리가 이 회담을 통해 마련됐던 것이다.” 나카오 교수의 평가다.
전쟁 전엔 존경받는 선승(禪僧)으로, 전쟁 중엔 충성스러운 장수로, 전쟁 후엔 탁월한 외교관으로 활약했던 사명대사. 글씨체와 시에는 그의 세 모습이 모두 어른거린다.
심규선 대기자 kss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