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아 11월호/베스트셀러 10년 변천사] 경쟁 → 위로 → 재미 → 이득 → ? ● 경쟁·성공 키워드 시들 ● ‘재미있는 스토리’ 많이 팔려 ● 위로·교양·대화법 등 인기
서울의 한 대형서점 신간 소개 코너.
이런 현상은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2000년대 중후반 서점가를 휩쓴 베스트셀러의 특징은 ‘나만의 경쟁력을 키워 성공하는 것’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면 지금보다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게 책을 관통하는 핵심 줄기였다. 그 결과 성공학 도서가 2005~2008년 베스트셀러 순위를 장악했다. ‘자기계발 시대’가 열린 것이다. 성공학 도서는 개인의 극적인 성공을 강조한다. 각종 자기계발서와 재테크서가 그런 예다.
그러나 요즘 도서 시장은 사람들에게 ‘치열하게 살라’고 주문하지 않는다. 대신 재미있는 이야기로 즐거움을 선사한다. 혹은 현재의 삶에 도움이 되는 ‘꿀팁(유익한 정보)’을 제공한다. 10년 새 베스트셀러의 트렌드가 크게 달라졌다. 이런 관점에서 쓰인 책들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고, 이를 통해 성공학 도서의 배경이던 ‘신자유주의’가 힘을 잃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신자유주의 재해석
베스트셀러 목록과 그 책들의 목차를 살펴보면 신자유주의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음을 한눈에 읽을 수 있다. 꼭 10년 전인 2005년 교보문고 종합 분야 베스트셀러 1위는 ‘살아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였다. 목차엔 ‘3주 계획으로 나쁜 습관 고치기’ ‘날마다 15분씩 책 읽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배우기’ ‘꿈을 설계하고 성취하기’ 등 자신의 능력을 믿고 성공하기 위한 방법론이 요약돼 있다.
이듬해인 2006년 종합 분야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마시멜로 이야기’도 당시 트렌드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현실은 말할 수 없을 만큼 척박하지만 참고 노력하라는 게 이 책의 주된 내용. 이런 기조는 젊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책에서도 나타난다. ‘여자생활백서’(14위), ‘여자의 모든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17위) 등 제목만 봐도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도서들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한 권의 책이 2년 동안 종합 분야 베스트셀러 1위를 장식한 일도 있었다. 2007~2008년 도서 시장을 강타한 ‘시크릿’이다. 이 책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물리적인 세계 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고 설파한다. 2007년 베스트셀러 3위와 6위에 오른 ‘대한민국 20대 재테크에 미쳐라’ ‘바보처럼 공부하고 천재처럼 노력하라’도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을 강조한다. 이 역시 신자유주의를 밑바탕에 깔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때부터 청년들을 위한 자기계발서가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올랐다. 한기호 소장은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자기계발서를 구입하는 연령대가 30~40대 직장인에서 20대로 내려갔다”며 “이는 경쟁의 논리, 신자유주의 논리가 중년층을 넘어 20대 청년층까지 전파됐음을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최근 베스트셀러 트렌드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2015년 상반기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등극한 책은 ‘미움받을 용기’다. 언뜻 ‘힐링 도서’처럼 보이지만 좀 다르다. 상처받은 사람을 위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매뉴얼이 신통하지 않다면 반짝 인기에 그칠 텐데, 딱히 그렇지도 않다. ‘미움받을 용기’는 올 3월부터 총 31주간(9월 30일 기준) 종합 분야 베스트셀러 순위 1위를 지켰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2위)은 정치, 경제, 사회, 역사 등 인기 팟캐스트 방송 내용을 책으로 묶었다. 독자들 사이에선 ‘교양 입문서’로 불린다. 해당 분야를 전혀 모르는 초보자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도록 쉽게 풀어 썼기 때문. ‘하버드 새벽 4시 반’(4위),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현실너머 편’(7위), ‘7번 읽기 공부법’(10위) 등도 일상생활에 유익한 정보를 제공한다.
이런 책들의 공통점은 독자에게 ‘뭔가’를 준다는 것이다. 지친 사람에겐 용기와 희망(‘미움받을 용기’)을, 진솔한 대화에 목마른 이에겐 성공적인 대화법(‘대화의 신’)을, 식견이 필요한 독자에겐 교양(‘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을 쌓게 해준다. 독자들이 누군가로부터 동기를 부여받으려 하기보다 실용적인 자기계발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얘기다.
박정남 교보문고 MD(상품기획자)는 “2015년 상반기 종합 분야 베스트셀러 10위권에 성공을 강조하거나 경쟁을 주문하는 책은 한 권도 없다”며 “2000년대 중반과 비교할 때 신자유주의에 입각해 쓴 도서들의 영향력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분야별 베스트셀러 목록을 훑어보면 이런 현상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2005년 정치·사회 분야 베스트셀러는 사회 인사의 입을 빌려 개인의 각성을 촉구했다. ‘대화’(1위),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1편’(2위)이 대표적이다. 전자는 이 시대의 지식인으로 꼽히는 리영희 선생의 눈을 통해 한국의 문제점을 분석했고, 후자는 20여 년간 정치 현장에 몸담은 정치인 박철언 전 체육청소년부 장관의 경험을 토대로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살폈다.
‘자본주의를 수리해 쓰자’
2014년 정치·사회 분야 베스트셀러에서도 비슷한 분위기가 읽힌다. 신자유주의 원칙에 대한 탐구가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이다. 1위를 차지한 토마 피케티 교수의 ‘21세기 자본’은 부와 소득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조명하고, 양극화 문제와 불평등 구조를 날카롭게 파헤쳤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는 인간의 생사를 가르는 상황이 신자유주의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양극화 해소 방법에 집중한다.
자본주의의 불합리성을 고발한 책도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3위)는 진정한 삶의 가치와 노동의 의미를 강조한다. 권호순 대한출판문화협회 이사는 “이들 책은 신자유주의의 원칙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인식함으로써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을 찾고 그것을 통해 자본주의를 수리해서 쓰자고 말한다”고 분석했다.
경제 관련 베스트셀러 목록에선 이런 기조가 더욱 짙어졌다. 2005년 경제·경영 분야 베스트셀러 1위는 ‘블루오션 전략’이다. 이 책은 애초에 경쟁자가 없는 시장 공간을 창출해야 사업이 성공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전략적인 성공을 거두기 위한 필수조건을 제안한다. ‘미운오리새끼의 출근’(4위)은 성공적인 직장생활 메뉴를, ‘CEO 안철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6위)’은 급변하는 글로벌 시대에 개인과 조직이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성공법을 제시한다.
당시 출간된 경제 전망서도 이런 분위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자유주의 경제학자 공병호의 저서 ‘10년 후 세계’(7위)와 ‘10년 후 한국’(10위)은 다가오는 혼란의 시대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를 짚었다. 목차에는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생존하라, 그것은 시대의 사명이다’가 등장한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필요한 생존법을 설파한 것.
하지만 2014년 경제·경영 분야 베스트셀러 목록에선 이전에 볼 수 없던 메시지가 읽힌다.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다. 1위에 오른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가 그렇다. 이 책은 신고전주의 학파를 중심으로 전개된 경제학의 현주소를 지적한다. 아울러 경제학에 접근하는 방법이 다양하다고 주장한다.
현재를 즐겨라, 수준 있게
경제·경영 분야 베스트셀러 6위 ‘자본주의(EBS 다큐프라임)’는 위기의 자본주의를 구할 대안으로 복지자본주의를 제안한다. ‘관찰의 힘’(7위)은 기업의 오만과 편견을 거론하면서 가난한 소비자들로부터 배울 점을 언급한다. 2014년 경제·경영 분야 베스트셀러에선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경제 서적을 아예 찾아볼 수 없다. ‘식당부자들’(8위), ‘지금 중국 주식 천만원이면 10년 후 강남 아파트를 산다’(9위), ‘부자들의 생각법’(10위) 등 부자를 조명한 경제 서적이 베스트셀러 하위권에 머물렀을 뿐이다.
박정남 MD는 “기업가의 성공 스토리나 재테크 서적이 아닌 경제학 도서가 경제·경영 분야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한 것은 2008년 ‘나쁜 사마리아인들’ 이후로 6년 만의 일”이라며 “흥미롭게도 두 권 모두 신자유주의와 신고전학파에 비판적인 장하준 교수가 집필했다”고 설명했다.
문학계는 자유경쟁을 옹호하는 신자유주의를 피해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다빈치 코드’(1위), ‘모모’(2위), ‘연금술사’(3위), ‘해리포터와 혼혈왕자 제6권 1편’(4위),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5위) 등 모험을 그린 작품들이 2005년 문학 분야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차지한 것이다.
그로부터 10년 후, 독자들은 ‘재미’에 빠졌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1위), ‘미 비포 유’(3위),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5위),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14위) 등이 2014년 문학 분야 베스트셀러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이들 소설은 가독성이 뛰어나다고 평가된다. 반면 무거운 주제의 작품은 하위권에 머물렀다. 조정래의 ‘정글만리’와 김진명의 ‘싸드’는 각각 6위와 10위를 기록했다. 독자들이 무거운 이야기보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선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10년간 베스트셀러 트렌드를 분석하면 ‘경쟁→위로→재미→이득’으로 요약된다. 그렇다면 책을 보는 관점이 달라진 이유는 뭘까. 권호순 이사의 분석은 이렇다.
“사람들이 신자유주의가 말하는 대로 경쟁을 했지만 자유경쟁은 해답이 아니란 걸 깨닫게 됐다. 유감스럽게도 대한민국 사회가 더 이상 국민을 책임져줄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됐다. 이제 개인의 힘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분노, 공감, 위로보다는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방법을 찾게 됐다.”
경제불황에 따른 영향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지금은 저성장기이자 경제 정체기다. 문제는 앞으로가 더 안 좋아질 것이란 점이다. 하루하루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고민해봤자 달라질 것이 없으니 현재를 즐기고 소비하려 한다. 짧고 인상이 강한 소재가 인기를 얻는 이유다. 다만 단순히 재밌어서는 안 되고 보통 이상의 수준을 갖춰야 한다. 독자들이 읽고 얻는 게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박익순 한국출판저작권연구소장)
독자가 피로감 호소할 때
앞으로 독자의 눈을 사로잡을 책은 어떤 책일까. 박정남 MD는 “독자들이 ‘피로감’에 휩싸일 때가 베스트셀러 트렌드가 바뀌는 지점이 된다”고 지적한다.
“2005년 자기계발의 시대가 열렸고, 2009년엔 힐링 도서, 2014년엔 짧고 재밌는 이야기, 2015년 상반기엔 독자에게 도움이 되는 도서가 인기를 끌었다. 이를 근거로 예상할 때 2016년엔 컬러링북처럼 감성을 자극하는 책이나 짧은 에세이가 독자의 사랑을 받지 않을까 전망한다.”
김건희 | 객원기자 kkh4792@hanmail.net
<이 기사는 신동아 2015년11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