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기자
지도자의 선택은 ‘책임과 미련’의 차원을 넘어선다. 어떤 지도자가 되고 싶은지를 선택한다는 것은 곧 국가의 미래와 직결된다. 그렇기에 지도자의 선택은 괴로움을 넘어 두려움이어야 한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스산한 겨울날 오후 3시쯤 서울 종로의 한 한정식집에 들어섰다. 안주에는 손을 대지 않고 백세주 3병을 들이켰다. 그러더니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나는 대통령을 하고 싶지 않다.” 이 남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2002년 대선을 1주일쯤 남겨둔 시점이었다고 한다. 이 한정식집 여종업원에게서 전해 들은 얘기다.
그에게 투영된 사회적 갈망은 변화였다. 늘 비주류로 살아온 노무현의 ‘변방정신’이 공존과 공생의 변화를 이끌 것으로 기대했다.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책 ‘담론’에서 “변화와 창조는 중심부가 아닌 늘 변방에서 이뤄진다. 중심부는 기존의 가치를 지키는 보루일 뿐 창조의 공간이 못 된다”고 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변화의 동력을 모으기보다 중심부와의 전쟁에 몰두했다. 그의 실패 이유도 ‘담론’ 속에 있다. “변방이 창조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전제가 있다.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어야 한다.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가 청산되지 않는 한 변방은 중심부보다 더 완고한 교조적 공간이 될 뿐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역사전쟁, 이념전쟁은 ‘중심부의 가치 지키기’로 요약된다. 대한민국 건국과 근대화, 산업화의 성과는 우리가 딛고 선 이 땅이 증언하는 가치다. 그럼에도 변방이 집요하게 ‘역사 흔들기’에 나서자 박 대통령은 교과서 국정화란 전면전을 택했다.
박 대통령은 과거 언론 인터뷰에서 “내 삶의 목표는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했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부친 김용주 전 전남방직 회장도 친일 시비에 휘말렸으니 여권의 역사전쟁은 필연일지 모른다.
10·28 재·보궐선거 결과 야당이 참패했다. 여당은 역사 교과서 국정화의 당위성을 인정받았다고 자평한다. 하지만 투표율은 20.1%로 헌정 사상 최저였다. 주요 선거가 없어 유권자의 관심이 크게 떨어진 결과일 수 있다. 하지만 ‘노무현의 전쟁, 박근혜의 전쟁’에 넌더리가 난 민초들이 변화에 대한 갈망마저 접은 것은 아닌지 불길한 예감이 든다.
논어에는 ‘효당갈력 충즉진명(孝當竭力 忠則盡命)’이란 말이 있다. 힘을 다해 효도하고, 목숨을 바쳐 충성하라는 얘기다. 힘을 다함보다 목숨을 바침이 더 비장하다. 효도보다 충성이 우선이라는 얘기다.
국가 경제의 비상벨이 곳곳에서 울리는 상황에서 충성은 무엇인가.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미래 성장산업을 키우는 것 이상으로 현 시점에서 지도자가 목숨을 바쳐야 할 일이 또 있는가. 그것을 위해 ‘변방의 박정희’가 목숨을 걸고 군사정변을 일으킨 것 아닌가.
중심부는 기존 가치를 지키느라 변하지 못한다는 역사의 교훈을 확인시켜 주려는 게 아니라면 경제성과로 자신들이 지키고자 하는 가치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것이 옳다. 그것이 역사전쟁의 최종 승자가 되는 길이다.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