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영석 록셔리 매거진 편집장
요즘에는 뭐 이리 광고 전화가 많은지 걸려오는 연락에 모두 응했다가는 금세 기분이 상하고 만다. 상대가 듣든 말든 얼마나 강건하게 자기 할 말만을 쏟아내는지, 애매하게 굴었다가는 10분 넘게 상품 설명을 들어야 할 지경이 돼버린다.
몇 달 전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를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수화기 너머로 조심스럽게 내 이름을 확인하는 상대가 자신을 모 매거진의 에디터라고 소개했다. 3년 전 인터뷰를 했던 곳이다. 창간 8주년을 맞아 그동안 잡지를 만들며 만났던 사람들에게 다시 질문을 건네는 형식으로 내용을 채울 계획이라고 말했다. 내가 받은 질문은 ‘당신이 8년 동안 이룬 것은 무엇인가’였다.
뭐가 더 있을까. 지난 시간을 반추하니 주위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의 얼굴이 많이 바뀐 것 같았다. 20대 초중반, 대머리 아저씨가 될 때까지 함께할 거라 생각했던 좋은 친구 중 몇몇은 어쩐 일인지 이제는 전화 한 통 걸기도 어색한 사이가 돼 있었다. 지난 시간을 그리워하는 일은 과거의 미련이나 현실의 불만족에 집중하는 것처럼 느껴져 스스로 경계해 왔던 일이다. 하나 옛 시간을 떠올리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이뤄낸 일보다 먼저 상실의 자국을 집어내고 있었다.
최근에 한 친구는 얼마 전 일부 기능의 서비스를 종료한 미니홈피의 내용을 백업하려고 오랜만에 싸이월드에 들어가 보았다고 했다. 그 시절 친구들이 남긴 흔적을 훑으며 어쩐지 곁에서 하나둘 사람이 떠나가는 것 같은 씁쓸함을 느꼈다고 했다. 간혹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나눌 때면 사는 게 뭐 그렇지, 하며 이미 세상을 다 산 것처럼 체념한 사람에서부터 시작해 적잖이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게 된다.
서운한 일이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려 하는 편이다. 똑같은 환경에서 시간을 쭉 같이 보내지 않는 이상 나이를 먹어가며 서로의 가치관은 달라지기 마련이고, 각기 다른 분야에서 각자의 생활에 노력하며 함께 나눌 수 있는 공통분모 또한 계속 줄어갈 것이다. 그사이 서로에 대한 관심도, 함께 보내게 되는 시간도 점점 다른 쪽으로 이동하며 작아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테다. 노력한다고 해서 붙잡을 수 있는 게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러니 어릴 적 쌓은 관계가 예전 같지 않게 어그러진 상황 앞에서 내가 더 자주 연락을 했으면 괜찮았을 텐데 하고 자책할 일도, 어느 누구에게서 잘못을 찾을 일도 아닌 것이다. 소원해진 관계를 다시 회복한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잊지 않고 가끔씩 안부를 전하는 것, 그것으로도 나쁘지 않은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난 8년간 적잖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었고 또 멀어졌다. 질문의 답변을 생각하며 매 시기 진심으로 마음을 나눠준 친구들 덕분에 더 많이 웃을 수 있었던 것 같아 큰 고마움을 느꼈다. 멀어진 만큼 또 멋진 친구들을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 다행이라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와인과 친구는 오래될수록 좋다’고 했던가. 다시 또 8년이 지나 지금을 돌이켜볼 때 곁에 오래된 친구를 두는 방법, 그것은 지금의 좋은 사람들과 진심으로 마음을 함께하는 일이 아닐까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