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초 문예지 ‘문학동네’ 창간을 준비하던 강태형 당시 주간은 신문사를 그만둔 김훈 씨를 만났다. 미문의 기자로 유명했던 김 씨에게 강 주간은 소설 쓰기를 권했다. 김 씨는 단박에 거절했지만, 강 주간은 이후로도 수차례 소설을 청탁했다. 몇 달 뒤 강 주간이 김 씨의 자택에 찾아간 어느 날, 김 씨는 없었고 김 씨의 아내만 있었다. 김 씨의 방을 들여다보니 책상 위에 글자가 가득 적힌 원고지가 쌓여 있었다. ‘빗살무늬 토기의 안쪽’이라는 제목의 소설이었다. 그해 겨울 창간된 ‘문학동네’ 제1호에 연재를 시작한 장편 ‘빗살무늬 토기의 추억’의 원형이었다. 훗날 ‘한국 문학에 벼락처럼 쏟아진 축복’이라는 평을 얻게 되는 김훈 씨가 ‘소설가’라는 새로운 이력을 시작하게 된 작품이기도 했다.
이듬해 봄 설립된 출판사 문학동네로 30대 초반의 시인이 찾아왔다. 소설을 썼다는 것이었다. 출판사의 대표가 된 강태형 사장은 작품을 읽어봤다. 주인공 깡패가 차 사고로 절벽에서 떨어지는 4.5초 동안 지나온 삶을 반추한다는 내용이었다. 보통 아닌 입담에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단편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는 1995년 문학동네 여름호에 실렸다.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으로 불리게 될 성석제 씨가 시인에서 소설가로 전업해 첫발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문학과지성사(문지)와 창작과비평사(창비)의 양대 구도였던 문학판에서 1990년대 문학동네의 출현은 신선했다. “문단에선 작가 이름보다는 ‘문지 작가’, ‘창비 작가’로 먼저 분류됐다. 문학동네의 등장과 함께 작가 한 명 한 명이 보이기 시작했다. 문학동네 편집위원들은 정치적 성향이나 사회적 이슈, 출신 학교 어느 쪽으로도 묶이지 않았다. 공통점이라고는 ‘문학을 절실하게 지향한다’는 것이었다.” 한 출판사 대표의 회고는 개인성을 중시했던 1990년대 문학과 문학동네(문예지 및 출판사)의 활약이 궤를 같이했음을 확인시킨다. 문학동네는 김훈 성석제 씨 등 뛰어난 작가들을 발굴했고 신경숙 은희경 김영하 김연수 씨 등 1990년대 이후 스타 작가들의 주요 산실이 됐다. 성장세가 이어지면서 한국 문학을 감성화시켰다는 지적, 상업성에 경도됐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이른바 ‘문학권력’으로 지목됐고, 많은 임프린트가 대기업 계열사를 닮았다는 얘기도 나왔다.
“지난 연대의 험난했던 정치적 억압을 우리 문학이 지혜로우면서도 강인한 투쟁으로 돌파해냈듯이 오늘날 우리 문학을 둘러싼 다양다기한 문제들 역시 고단하긴 하지만 결코 멈출 수 없는 정면승부를 통해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라고 21년 전 창간사는 밝혔다. 우리 문학을 둘러싼 문제들은 2015년에도 현재진행형이다. 새로워지기로 다짐한 문학동네가 지혜롭고도 강인한 정면승부를 통해 이 문제들을 해결할 것을 기대해 본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