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주 되자” 꿈 하나로 맨손 창업… 한국 크루즈 개척
김현겸 팬스타그룹 회장이 부산 연안에서 주말 크루즈를 하는 팬스타드림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
막 창업한 그는 일감이 절실했다. 공장 담 너머로 컨테이너가 보이던 회사의 사장 집을 무작정 찾아가 일주일 동안 인사를 했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다음 날 다시 가 인사했다.
생면부지인 사장이 차창을 내리고 말했다. 역정 반, 호감 반이었다. 경기 안산시 반월공단에 있는 회사로 찾아갔다. 사장은 “일단 부닥쳐 해결하는 도전정신이 부럽다”며 일감을 줬다.
이런 패기로 그 회사가 만든 건축자재를 일본으로 수송하는 일을 따낸 주인공은 김현겸 팬스타그룹 회장(53)이다.
“배를 갖겠다.”
부산 앞바다를 보며 자란 그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도로스가 되기로 결심했다. 해양대 진학을 원했으나 시력 기준 때문에 지원조차 하지 못했다. 성균관대 토목공학과를 마친 그는 바다에 미련이 남아 해운회사에 입사했다. 국내 기업이 만든 제품을 일본으로 수송하고 수수료를 받는 해외영업을 주로 했다.
화물선을 가지려고 2001년 조양상선 자회사 인수에 나섰다. 그러나 기존 선사들이 반대해 무산됐다. 화물선을 포기하고 승객도 싣는 카페리로 눈을 돌렸다. 마침 일본에서 건조한 지 4년 된 카페리가 매물로 나왔다. 가격은 화물선의 10배가 넘는 350억 원이었다. 2002년 자산을 처분하고 금융회사에서 돈을 빌려 간절히 바라던 배를 샀다. 승객 681명과 화물 220TEU(1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대)를 실을 수 있는 2만1688t급 카페리였다. ‘팬스타드림’호로 명명했다.
“세금을 많이 내는 선주가 되겠다.”
선주는 세금을 덜 내고 값싼 외국인 선원을 쓰려고 선박을 제3국에 주로 등록한다. 그는 주위의 권유를 뿌리치고 우리나라에 등록했다. 대한민국 선적 1호 카페리 선주가 됐다. 이전에 없던 부산∼오사카 항로도 개설했다. 태극기를 휘날리며 일본 지중해로 불리는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를 사상 처음으로 지나자 가슴이 뭉클했다.
운항 초기에 물동량을 확보하지 못해 매출이 200달러도 안 되는 화물을 싣고 떠나기도 했다. 한 번 운항하면 수천만 원을 손해 봤다. 누적 적자가 100억 원에 이르자 주 6일 동안 3회 왕복하는 부산∼오사카 노선을 줄이자는 건의가 올라왔다. 결항하면 망한다며 정기 운항을 밀어붙였다.
“크루즈 시대에 대비하자.”
2004년 팬스타드림호가 쉬는 토요일을 이용해 부산 연안을 둘러보며 선상에서 1박을 하는 주말 크루즈를 국내 처음으로 선보였다. 국제선을 국내에서 운항하자 관계당국이 반대했으나 해양관광의 중요성을 내세워 승인을 받았다. 한일 월드컵 이후 화물과 여행객이 늘어 2007년 일본에서 카페리 ‘팬스타써니’호(2만6847t), 이듬해 ‘팬스타허니’호(1만4036t)를 사들였다.
호사다마일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자 물동량과 여행객이 급감해 대출금을 갚기 어려웠다. 매각의 기로에 섰으나 일본 선주가 채권 회수를 유예해줘 위기를 넘겼다. 팬스타써니호는 팔고 팬스타허니호는 반환했다.
3척이 오가던 항로에 1척만 운항하자 다시 화물과 승객이 몰렸다. 2010년 ‘산스타드림’호(1만1820t), 2012년 ‘스타링크원’호(1만2968t), 2013년 ‘스타링크호프’호(3593t) 등 고속 화물페리 3척을 구입했다. 항로도 가나자와, 쓰루가, 요코하마, 도쿄 등으로 넓혔다.
김 회장은 샐러리맨으로 시작해 팬스타그룹을 대형 선박 4척에 연매출 1500억 원이 넘는 카페리선사로 키웠다. 크루즈 개척자인 그는 승객 2500명이 탈 수 있는 7만 t급 크루즈선을 들여와 국적 크루즈선 시대를 열기 위해 지금도 뛰고 있다.
김상철 전문기자 sckim0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