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아 11월호/충격 리포트] 늘어나는 ‘가족살인’ 피붙이라 더 잔혹하다? 살인사건은 해마다 줄지만 가족 간 살인은 증가세다. 2009년 발생한 살인범죄는 1374건. 이 중 17.2%가 가족살인이었다. 2013년엔 살인범죄가 929건으로 줄었지만, 가족살인 비율은 20.7%로 4년 전보다 높아졌다. 가족 간 유대감이 유독 강한 한국에서 왜 가족살인이 늘어날까.
일격을 당한 남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건조한 목소리로 “자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방을 나갔다. 그때만 해도 정군은 불과 몇 초 뒤에 벌어질 끔찍한 사태를 예상하지 못했다. 이불에서 빠져나와 무릎걸음으로 방문을 닫으려고 손을 뻗은 정군의 눈앞에 식칼을 든 남자가 나타난 것. 좁은 방에서 미처 피할 새도 없이 남자가 휘두른 칼이 정군의 몸 곳곳에 크고 깊은 상처를 입혔다. 맨손으로 칼날을 붙잡고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정군은 죽음의 공포가 닥친 순간 그대로 자리에 쓰러졌다. 남자는 정군의 몸을 이불로 덮어 가린 채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죽은 척 쓰러져 있던 정군은 밖에서 남자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이불 밑으로 손을 뻗어 휴대전화를 끌어당겼다. 신경이 끊어져 못 쓰게 된 오른팔 대신 피투성이 왼손으로 힘겹게 전화 버튼을 누른 정군은 경찰에 “우리 집 현관 비밀번호가 ○○○○번이다. 절대 사이렌을 울리지 말고 조용히 집 안으로 들어와서 작은방에 있는 나를 구해 달라”고 했다. 비록 친자식은 아니지만 11년간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며 믿고 따르던 정군을 잔혹하게 칼로 찌르고 방치한 남자는 출동한 경찰에게 안방에서 체포됐고 살인미수죄로 12년형을 선고받았다.
한순간을 못 참고
“아이가 두 차례 대수술을 받았지만 지금도 오른팔과 양손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 아직 정신과 치료도 받고 있다. 그나마 전학한 뒤로 학교생활을 잘하고 있어 대견하다. 두 번 다시 떠올리기 싫은 끔찍하고 가슴 아픈 일이지만, 어린 나이에 용기를 내서 침착하고 의연하게 대처해 스스로 목숨을 구한 아들이 자신감을 갖고 당당하게 살아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가족이 소중한 것은 세상살이가 아무리 험하고 고달파도 언제나 곁에서 든든하게 지켜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치열한 삶의 전쟁터에서 안식처이자 피난처가 되는 것도 가족이다. 그런데도 이런 믿음과 기대를 무참히 깨뜨리는 ‘가족 간 살인’이 끊이지 않는다.
10월 2일 강원도 횡성에서 30대 초반의 박모 씨가 아버지를 둔기로 때려 살해한 뒤 집에 불을 지른 사건이 발생했다. 술에 취해 운전을 하려던 그를 아버지가 꾸짖으며 말리자 격분해서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 특별한 직업이 없는 박씨는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와 수개월째 갈등을 겪어온 것으로 드러났다.
같은 날, 남편과 불화를 겪던 40대 초반의 김모 씨가 결혼 13년 만에 얻은 생후 53일 된 친딸을 살해해 구속됐다. 경찰 조사 결과 김씨는 남편과 육아 문제로 다투다 남편이 “이혼하고 딸을 데려가서 못 키우게 되면 보육원에 보내겠다”고 하자 아기를 물에 빠뜨려 숨지게 했다. 9월에는 제주에서 50대 초반의 가장 고모 씨가 재혼한 아내, 아내와 전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어린 남매를 흉기와 둔기로 무참히 살해한 뒤 스스로 목을 매 숨졌다.
김밥 때문에 親父 살해
가족 간 살인범죄의 유형엔 분노에 의한 범죄, 금전을 노린 범죄, 정신질환에 의한 범죄 등이 있다. 분노에 의한 범죄는 평소 분노를 적절하게 해소하지 못하고 쌓아오다 순간적으로 화가 폭발하면서 발생한다. 여러 가족이 모이는 명절 연휴에 폭행이나 살인 같은 범죄가 많이 일어나는 것도 평소 떨어져 지내며 제때 풀지 못하고 묵혀둔 서운한 감정이나 불만이 한순간에 폭발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경찰청 과학수사센터 범죄행동분석팀 권일용 경감의 설명이다.
“가족 간 살인을 부르는 금전 문제나 부부갈등, 가정불화, 가정폭력, 외도 같은 요인은 과거에도 늘 있어왔다. 예전에는 다들 겪어내고 참아내던 일들을 지금은 못 참기 때문에 분노 범죄로 연결된다. 고교 3학년 남자아이가 김밥 때문에 친아버지를 칼로 찔러 죽인 사건도 있다. 학교 갔다 와서 먹으려고 감춰둔 김밥을 아버지가 여러 번 찾아내 먹어버리자 화가 치솟은 것이다. 분노를 촉발한 건 김밥이지만, 저변에는 어릴 적 가정폭력과 부모의 이혼 등으로 인한 고립감, 배제감 같은 부정적 감정이 쌓여 있었다.”
2월 전모 씨가 엽총을 난사해 형 부부와 출동한 경찰관까지 살해한 뒤 자살한 경기 화성시의 주택 현장.
지난 5월 창원지방검찰청 진주지청은 가장을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친 일가족 3명을 존속살해미수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멀쩡히 살아 있는 가장을 상대로 아내와 자식들이 상속재산을 노리고 범행을 공모한 뒤 집요하고 잔혹하게 실행에 옮겨 충격을 더했다. 검찰 기소 3개월 전, 60대 초반의 아내 김모 씨와 30대 초·중반의 강모 씨 남매는 남편이자 아버지를 수면제와 농약을 먹여 살해한 뒤 자살로 꾸미려고 모의했다. 병원을 돌면서 수면제를 사 모으고 농약을 구입해 범행을 저지르려는 순간 김씨가 마음을 바꿔 남편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정신질환 가족 쉬쉬하다가…
보험금과 재산 등 금전을 둘러싼 범죄는 최근 부모뿐 아니라 부부, 형제 등을 상대로도 자행된다. 가족 간 분노 범죄가 우발적이라면 금전을 노린 범죄는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살해 후 불을 질러 범죄 흔적을 지우거나 방화로 위장하는 수법도 동원된다.
지난 2월의 경기 화성 엽총 난사 사건은 상속재산을 둘러싼 다툼이 ‘계획적 총기 살인’이라는 끔찍한 범죄를 낳은 경우다. 일가족 2명과 경찰관 1명 등 3명이 희생됐다. 같은 달 발생한 세종시 편의점 총기 난사 사건은 내연녀를 비롯한 일가족 3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총기를 사용해 한꺼번에 여러 명의 사망자를 낳는 가족 간 살인사건은 과거엔 찾아보기 드문 사례다. 범죄 전문가들은 이처럼 가족살인이 전례가 드문 양상으로 변화하고 있는 점을 우려한다.
정신질환에 의한 범죄는 가족 간 살인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다. 서울지방경찰청 정성국 검시조사관(이학박사)이 지난해 대한법의학회지에 발표한 논문 ‘한국의 존속살해와 자식살해 분석’에 따르면 2006년부터 2013년 3월까지 전국에서 발생한 존속살해 사건 중 정신질환을 가진 피의자가 저지른 범죄는 약 40%에 달했다. 자식살해 사건 피의자 중 정신질환자 비율은 약 30%였다. 정성국 박사의 설명을 들어보자.
“정신질환자에 의한 가족 간 살인은 환청이나 망상을 동반하는 조현병(정신분열증)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은데, 매우 잔혹한 게 특징이다. 평소 멀쩡하던 사람이 환청이 들리고 망상에 사로잡히면 옆에 있는 가족이 귀신이나 악마로 보이기 때문이다.
제주에서 20대 초반 대학생이 어머니를 살해한 사건이 있었는데, 두 사람은 전날 함께 목욕탕에도 다녀왔다. 다음 날 딸이 어머니를 살해한 뒤 안구를 파내고 아킬레스건을 잘랐다. 우리나라에선 가족 중에 정신질환자가 있어도 쉬쉬하면서 병원 치료를 기피하는 경우가 많다. 조기 치료로 예방이 가능한데 그릇된 편견이 가족 간 살인범죄를 증가시킨다.”
가족살인 가운데 존속살해가 차지하는 비율은 우리나라가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선진국에 비해 3배 정도 높다. 이는 우리의 독특한 가족문화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부모가 자식을 독립된 인격체가 아니라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고, 그런 부모에 기대 성인이 돼서도 경제적·정신적으로 독립하지 못하는 자식이 많다보니 가족 간 갈등의 골이 깊어진다.
9월 경찰교육원은 ‘무궁화 디딤돌 캠프’를 마련해 살인범죄 피해 유가족 지원에 나섰다.
스트레스 지수 낮춰야
가족 간 살인, 묻지마 범죄 같은 강력사건이 증가하면서 최근 그로 인해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 2008년 출범한 전국범죄피해자지원연합회는 전국 58곳의 범죄피해자지원센터와 함께 범죄 피해자 및 유가족을 대상으로 상담을 통해 치료비, 간병비, 긴급생계비, 취업을 지원하고 범죄 현장 정리와 이사를 돕는 등 다양한 서비스를 펴고 있다. 김지한 사무국장은 “지난해 지원활동 실적은 5만8400여 건으로 최근 3년 사이 53% 증가했다. 업무와 유가족 요구사항은 폭증하는데 일손이 부족해 고민”이라며 “범죄 피해자와 유가족 중에 경제사정이 열악한 사람이 많은데 우리가 돕는 데는 한계가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맨앞에 언급한 정군 사건의 경우 1년이 넘었지만 정군과 정군의 어머니는 지금까지 병원을 다니고 있다. 재활치료와 정신과 치료 때문이다. 생계가 막막하다.
“아이가 양손을 제대로 못 쓰니 내가 밥 먹이고 옷 입혀 등교시키고 병원에 데리고 다녀야 한다. 그러니 취업할 엄두를 못 낸다. 기초생활수급비를 신청하러 갔더니 직원이 ‘몸이 멀쩡한데 왜 일을 안 하느냐’고 하더라. 긴급생활비 지원을 받으려면 심사를 거쳐야 하는데, 2~3개월이 걸린다고 한다. 지금도 사람이 무섭고 밤마다 악몽으로 불면증에 시달리지만, 당장 생계가 급해 일주일에 2~3일 대리운전을 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가족 간 살인 범죄를 줄이려면 정부와 사회가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선 모두가 힘들어하기에 누가 누구를 위로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된다. 아이들은 미래의 성공을 위해 현재를 희생할 것을 강요당하고, 성인이 되면 그 스트레스를 부모나 사회로 전이하면서 가족 간 살인이나 묻지마 범죄로 연결된다. 우리 사회 전반의 스트레스 지수를 낮추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이유다.”(권일용 경감)
“가족 중 누군가가 정신질환이 있어도 질병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정신질환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편견을 없애는 등 가정 내 정신질환에 대한 인식 제고에 힘써야 한다. 적절한 치료를 위한 정책적, 제도적 보완도 필요하다. 가족 간 살인의 발단이 되는 가정폭력, 아동학대에 대한 경찰과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고, 관련기관 간에 유기적인 협조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정성국 박사)
▼인터뷰 |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화 풀고 위로하는 법 가르쳐야”
9월 중순, 충남 아산에 있는 경찰교육원은 ‘무궁화 디딤돌 캠프’를 마련해 살인범죄 피해 유가족들의 고통 극복 돕기에 나섰다. 1박2일 동안 열린 캠프에 유가족 14명을 비롯해 피해자 전담경찰관, 상담전문가, 관련학과 교수와 대학생 등 50여 명이 참가했다. 여러 프로그램 가운데 유가족이 겪은 경험과 아픔을 공유하는 심리치유 프로그램은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사진)가 직접 기획했다. 다음은 한 교수와의 일문일답.
-살인 피해 유가족에 주목한 이유는.
“일각에서 ‘피의자 인권은 있고 피해자 인권은 없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그동안 범죄 피해 유가족의 인권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게 사실이다. 범죄자에 대한 연구는 많이 이뤄졌지만 피해자와 유가족에 대한 연구는 소홀했던 게 안타까웠다. 그나마 최근 들어 관련 연구가 조금씩 이뤄지고 있어 다행스럽다.”
-가족 간 살인이 발생하면 그 가족이 받을 충격과 후유증이 엄청날 것 같다.
“가족 중 자살자가 1명 나오면 7명이 함께 죽는다고 한다. 나머지 가족이 ‘심리적 죽음’을 경험한다는 뜻이다. 하물며 살인범죄 가해자가 가족일 경우 나머지 가족 구성원은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닌’ 채로 살게 된다.”
-어떤 심정일지….
“한국인은 가족 내 살인으로 받는 충격이 서구인보다 훨씬 크다. 혈연을 중시하고 가족 유대감이 긴밀하기 때문이다. 특유의 문화에서 오는 충격도 있다. 살인범죄가 발생하면 사람들은 대개 피해자와 유가족을 동정하고 분노에 공감한다. 그런데 가족 간 범죄일 경우 동정의 여지나 위로가 차단된다. ‘어떻게 가족끼리…’라는 부정적 정서 때문에 유가족들이 상처를 좀처럼 겉으로 드러내지 못한다. 자신도 가해자(가족)와 연루돼 있다는 죄책감도 있어 심리적으로 ‘출구 없는 미로’에 갇히게 된다.”
-가족 간 살인은 사회에 미치는 파장도 클 것 같다.
“가족 간 살인은 일반 살인범죄보다 2, 3차 피해가 훨씬 크고 심각하다. 범죄 발생 원인을 놓고 서로 비난하고 원망하다 가족 와해를 불러오고 알코올 중독자가 되거나 자살하는 유가족도 생긴다. 결국 사회문제로 귀결된다. 범죄 피해를 직·간접적으로 당하거나 목격하면 사람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가 깨지고 나도 언제든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갖게 된다. 그 파장이 ‘불신 사회’를 만든다.”
-어떤 해결책이 있을 수 있나.
“화가 쌓이는 것은 대부분 가까이 있는 사람들 때문이고, 쌓아두면 병이 된다. 화가 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교육이 안 돼 있다. 선진국은 대인관계에서 화가 날 때 어떻게 대화하고 푸는지를 학교에서 가르친다. 우리는 누군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 어떻게 위로하고 도와야 할지도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다. 범죄 피해 유가족들은 ‘그만 잊어라’ ‘산 사람은 살아야지’ 같은 말을 듣기 싫어한다. 위로가 안 되기 때문이다. 심폐소생술을 가르치는 캠페인을 벌이는 것처럼 화 풀기 교육, 위로하고 도와주는 방법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
-그래서 한국생활상담협회를 만들었나.
“서로 힘들 때 대화 상대가 돼서 돕자는 취지로 만들었다. 생활상담의 기초가 되는 의사소통과 감정 나누기, 집단상담 참여 같은 교육을 할 계획이다. 원하는 사람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한국피해자지원협회(KOVA) 고문으로 활동 중인 한 교수는 최근 기업 대표, 교수, 교장, 언론인 등 각계 인사 20여 명으로 이사진을 구성해 한국생활상담협회를 출범하고 초대 회장을 맡았다.
박은경 객원기자 | siren52@hanmail.net
<이 기사는 신동아|11월호 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