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레퍼시픽 창업자 서성환 평전/ 나는 다시 태어나도 화장품이다] <8>새로운 출발선에 서다
사업 구조조정이라는 위기 속에서도 서성환 아모레퍼시픽 창업주는 미래를 위해 투자했다. 태평양중앙연구소 준공식 분위기는 숙연했다. 아모레퍼시픽 제공
외형으로 보면 놀라운 성장이었다. 문제는 이 회사들이 대부분 저조한 실적으로 태평양을 위기로 몰아넣었다는 점이다. 외부에서는 외국 화장품 기업들과 손잡은 후발주자들의 맹렬한 도전이, 내부적으로는 거대조직의 관료주의 병폐들이 나타나 태평양을 흔들기 시작했다.
1991년 5월 13일 저녁 수원공장에서 파업 중이던 노조 조합원들이 본사를 점거했다는 보고가 서성환 태평양 회장에게 전해졌다. 충격이었다. 당시 국내 산업계에 만연했던 노사분규의 아픔을 태평양도 피해 갈 수 없었다. 많은 회사들이 파업 기간 동안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적용했지만 그는 아무리 힘들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점거농성의 주동자로 구속된 조합원들의 선처를 바라는 서한을 경찰서에 보내는 등 직원 구명에도 최선을 다했다. 노조도 닫았던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앞으로도 나는 화장품을 할 것이다. 아니, 다시 태어나도 화장품을 할 것이다.”
사업 구조조정을 결심한 그는 신속하게 작업을 실행했다. 첫 단추는 태평양증권 매각이었다. 매각 직전 3년 연속 흑자를 낸 건실한 기업부터 욕심을 버리고 SK에 넘겼다. 구조조정 와중에도 미래를 생각해 기술 개발에 대한 투자는 멈추지 않았다. 회사의 존폐 위기 상황에서 태평양중앙연구소가 준공됐다. 준공식 분위기는 숙연하면서도 장엄하기까지 했다.
지칠 줄 모르던 그에게도 1991년 닥친 또 다른 시련은 견디기 힘들었다. 폐암이라는 병마와 싸워야 했다. 그는 68세의 나이로 폐암 수술을 성공적으로 받은 지 불과 45일 만에 다시 회사에 출근했다. 사업 구조조정도 원활하게 마무리돼 갔고 내부 혁신도 아들인 서경배 대표의 주도하에 잘 진행되고 있었다.
그해가 저물어 갈 즈음, 그는 녹차를 앞에 두고 서 대표와 마주 앉았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그가 입을 뗐다. “이제 회사의 의사 결정은 네가 했으면 싶다.” 위기와 절망의 시대를 뒤로하고 태평양이 다시금 50년 전의 출발선 앞에 서게 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