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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퍼즐’ 풀기, 불꽃 튄 추리대결… 경찰청 주최 CSI 콘퍼런스 행사

입력 | 2015-11-06 03:00:00

숨진채 발견된 여고생… 단서는 손톱의 빨간 매니큐어
검시 결과-의문의 지문 등 놓고 추리작가-학생 100여명 범인 추적




추리소설가 황세연, 김유철, 한이 씨(오른쪽부터)가 ‘과학수사의 날’인 4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추리소설작가, 프로파일러를 만나다’ 행사에 참가해 경찰이 재구성한 살인사건 용의자를 찾기 위해 다양한 추리를 교환하고 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실종된 여고생이 석 달 만에 숨진 채 발견됐다. 야산 입구에 있는 배수로에 싸늘한 주검이 돼 누워 있었다. 마치 그의 존재를 숨기려는 듯, 시신 위에는 TV포장 박스가 놓여 있었다. 숨진 A 양이 발견된 장소는 마지막으로 통화를 나눈 곳에서 불과 3km 떨어진 곳이었다. “20분 뒤 (집에) 도착해요”라며 어머니와 나눈 통화는 생전 A 양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흔적이 됐다.

수사에 나선 경찰은 시신의 부패 및 야생동물에 의한 훼손이 심해 사인을 밝히기 어렵다고 했다. 대부분의 유류품이 발견된 가운데 피해자의 속옷과 교복은 발견되지 않아 의구심을 키웠다. 피해자의 손톱에 칠해진 빨간 매니큐어는 과연 범인이 남긴 무언의 메시지일까.

빨간 매니큐어의 진실. 바로 당신이 해결해야 할 사건이다.

국내 1호 프로파일러인 권일용 경감(경찰청 과학수사센터 범죄행동분석팀장)은 차분한 목소리로 살인사건 수사보고서를 읽어 내려갔다. 스크린 앞에 앉은 추리소설가 4명은 물론이고 현장을 가득 채운 일반인 참가자 100여 명은 각자 수첩을 꺼내 사건의 단서를 옮겨 적기 바빴다. 실제 살인사건 브리핑 현장 분위기를 방불케 했다.

과학수사의 날인 4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중소기업중앙회관에서는 ‘추리소설작가, 프로파일러를 만나다’ 행사가 열렸다. 경찰청, 한국경찰과학수사학회가 공동 주최한 ‘2015 국제 CSI 콘퍼런스’의 일환으로 열린 이번 행사는 일반 시민에게 프로파일링의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과학수사에 대한 신뢰를 높이기 위한 자리였다. 행사에는 한국추리작가협회 소속 추리작가 4명(황세연, 김유철, 한이, 송시우) 외에도 대학생, 경찰 지망생 등 다양한 일반인이 참여했다. 현장에서 언급된 사건은 실제 미제 외에도 여러 살인사건을 참고해 경찰이 재구성한 가상의 사건이다.

제시된 용의자는 총 4명. 건설노동자는 A 양의 휴대전화가 발견된 건설현장에서 근무를 했고, 미술학원 선생은 A 양이 다니던 학원의 선생으로 평소 여성관계가 복잡했다는 이유로 각각 용의선상에 올랐다. 물류회사 직원은 시신을 덮은 포장박스에서 지문이 발견됐으며 금형공장 직원은 유일하게 여성 속옷을 훔쳐 체포된 전력이 있는 인물. 목격자는 피의자가 차량을 몰고 배수로 근처를 찾아왔으며 피해자보다 키가 한 뼘 정도 큰 성인 남성이라고 진술했다.

범인과의 숨바꼭질은 그가 면식범이냐 아니냐를 선별하는 작업에서 시작됐다. 피해자가 불과 한 달 전까지 살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검시 결과가 전해지면서 별도의 작업실 공간을 가진 학원 선생이 피의자로 급부상했다. 그가 평소 A 양을 각별하게 여겼으며 최근 승용차를 폐차시킨 사실이 알려지면서 추리는 한층 설득력을 얻었다.

다른 추리도 설득력이 있었다. 손톱에 칠해진 매니큐어를 근거로 속옷 절도 전과가 있는 금형공장 직원이 변태성욕을 이기지 못하고 범행을 저질렀을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박스에 남은 지문이 핵심 단서라며 물류회사 직원을 의심하기도 했다. 참가한 추리소설가 4명이 모두 다른 인물을 지목할 정도로 의견이 엇갈렸다.

프로파일러의 의견은 어땠을까. 권 경감은 실종 사건이 오후 5시 30분경 발생했다는 이유로 면식범의 범행 가능성을 후순위로 미뤘다. 어느 때고 피해자에게 접근 가능한 면식범이 굳이 주변이 훤히 보이는 시간과 공간에서 범행을 저지를 이유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두 달여의 감금도 면식범의 소행임을 입증하는 증거가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정상적인 인지가 불가능한 피해자가 가해자의 상황을 모르는 상태에서 탈출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며 “실제 사건에서 납치 피의자가 ‘나는 화장실도 가고 담배도 피웠다. 피해자를 납치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순식간에 좌중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결국 범인은 누구였을까. 행사 말미에 밝혀진 피의자는 학원 선생도, 속옷 도둑도 아닌 목격자였다. 2시간여에 걸친 범인 추적 끝에 의외의 답이 나오자 행사장 곳곳에서는 탄식이 새어 나왔다. 권 경감은 “사건 관계자 중 유일하게 A 양을 ‘여학생’이 아닌 ‘여자’로 칭한 부분이 피해자를 대화 상대로 여기고 있다는 단서”라고 설명했지만 그 또한 사실 결과론적인 이야기에 불과했다.

권 경감은 “선입견이 범인 추적 과정에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몸소 느끼도록 의외의 인물을 범인으로 설정했다”며 “프로파일링은 사건에 드러난 핵심 증거, 다양한 단서, 과거의 유사사건 등을 토대로 다양한 경우의 수를 따져보는 과정으로 매뉴얼은 있어도 모든 작업을 일반화할 순 없다”고 말했다.

강홍구 기자 windu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