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인정하면 벌금만 내고 아무도 몰래 조용히 나갈 수 있다”
일본 영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2007년)에서 경찰이 지하철 내 치한으로 몰린 주인공 남성에게 자백을 권유하는 내용이다. 유치장에 갇힌 남성에게 온 국선변호인도 “지하철 성추행은 재판에 가도 99% 진다”며 죄를 인정하고 처벌을 약하게 받자고 제안한다. 주인공은 재판에서 무죄가 입증될 거라 믿고 끝까지 법정 투쟁을 벌였지만 1심에서 징역 3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아 ‘성범죄자’ 낙인이 찍혔다. 그는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또다시 재판을 받았지만 유일한 증거인 피해자 진술 앞에선 아무 소용이 없었다.
지난해 9월 이모 씨(29)도 이 영화와 똑같은 현실에 직면했다. 사건은 퇴근시간대인 오후 7시 40분경 지하철 1호선 구로역~역곡역 방면 전동차에서 발생했다. 이 씨는 구로역에서 내리는 인파에 밀려 잠시 승강장으로 갔다가 다시 전동차에 올라탔다. 지하철은 초만원이었다. 탑승객들이 우르르 몰리는 대로 몸을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런데 잠시 후 한 경찰이 나타나 이 씨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이 씨가 지하철에 다시 타는 과정에서 20대 여성 A 씨의 엉덩이에 성기를 대고 밀었다는 것이다.
이 씨는 억울함을 호소하며 무죄를 주장했다. 하지만 1심 재판에서 유죄가 인정돼 징역 4개월을 선고받았다.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 있고 목격자인 경찰 진술도 영향을 미쳤다. 이 씨가 범행을 극구 부인하며 반성하지 않는 점도 고려됐다. 이 씨는 재판에서 “피해자 진술에 따르면 범인의 키는 165~167㎝정도라 했는데 내 키는 177㎝로 10㎝나 차이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 씨가 마른 체형에 구부정한 자세라 실제 키보다 작은 인상을 준다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씨의 항소심 국선 변호를 맡은 이동진 변호사는 A 씨의 1심 법정 진술에 주목했다. A 씨는 “경찰 조서를 쓸 때 ‘엉덩이를 스치는 느낌이 들었다’고만 적었는데, 경찰이 ‘이러면 너무 약하다’며 성기로 밀었다는 부분을 쓰라고 해서 그렇게 적었다”고 진술했다. 성추행을 했다는 남자의 얼굴도 A 씨가 직접 목격한 게 아니라 경찰이 지목한 데 따른 것이었다. 움직일 틈조차 없는 만원 지하철에서 이 씨가 A 씨의 엉덩이에 성기를 들이미는 걸 경찰이 직접 목격했다는 점도 의아했다.
2심 재판 때는 혼잡한 전동차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가피한 신체접촉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이 씨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재판부는 A 씨가 이 씨에게 추행을 당했다고 생각하게 된 건 경찰의 예단이 개입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대법원도 이 판단을 인정했다. 대법원 1부(주심 고영한 대법관)는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고 6일 밝혔다. 이 변호사는 “지하철 성추행 사건은 경찰이 피해자에게 사실보다 더 강력한 진술을 유도하는 사례가 많다”며 “이번 사건은 A 씨가 현장에서 느낀 점을 과장 없이 그대로 진술했기에 이 씨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조동주 기자 dj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