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세대갈등 몸살]<5>글로벌 전문가들의 세대갈등 진단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정치인은 자기 이익을 버리고 개혁의 진짜 이유를 국민에게 설명하라. 이렇게 마련한 사회적 합의를 토대로 세대 간 갈등을 푸는 개혁에 나서라.”
동아일보 특별취재팀이 그리스 독일 스웨덴 등 세대 간 갈등을 겪는 7개국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만난 글로벌 정치·경제 전문가들은 갈등 해소책을 이렇게 제시했다. 이들은 정부와 정치권이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에서 벗어나 진정한 소통을 해야 개혁이라는 대수술 과정에서 생기는 상처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글로벌 전문가들은 세대 간 갈등의 근본 원인을 사회생활의 출발 환경이 극도로 다르다는 점에서 찾았다. 산업화 과정에서 사회에 진출한 중장년층은 취업 재수라는 말을 모를 정도로 일자리가 많았다. 내 집 마련도 지금처럼 어렵지 않았다.
반면 현재 청년층은 부담만 잔뜩 짊어지고 있다. 영국에서는 청년층이 ‘짐 나르는 말 같은 세대(Packhorse Generation)’라고 불린다. 영국 시민단체인 ‘세대 간 재단’ 리즈 에머슨 대표는 “정부가 투표 참여율이 높은 중장년층을 위한 복지정책을 주로 내놓는 반면 청년을 위한 혜택을 대폭 줄였다”고 지적했다.
이탈리아 등 일부 유럽 국가에서는 연금개혁으로 연금 수령 시점이 뒤로 미뤄지면서 더 오래 일하고 싶어 하는 기성세대가 급증하고 있다. 이는 연금, 일자리, 주택시장에서 젊은층의 입지가 전방위적으로 좁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주의 마시모 바사로티 노동교육팀장은 “이탈리아 젊은이들이 최근 3, 4년 사이에 영국과 호주 등지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고 있다”며 “브레인 드레인(Brain Drain·두뇌 유출)이 우려되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아울러 연금 분야의 갈등은 전 세계적인 양상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했다. 연금개혁의 모범국인 독일조차도 최근 자녀를 가진 여성에 대해 연금을 추가로 지급하는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출산 크레디트’ 제도를 놓고 비슷한 논란이 있었다. 2008년 이후에 둘째 혹은 셋째 자녀를 낳은 여성에게 국민연금 가입 기간을 더 인정해주는 제도다.
청년층이 주거 문제로 고통받는 현상도 유럽과 한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예컨대 이탈리아에서는 월세가 치솟으면서 젊은이들이 부모에게 얹혀사는 ‘맘모네(Mommone)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의 젊은 세대도 혼자 힘으로 주거환경이 좋은 집을 사는 것이 불가능해졌을 뿐 아니라 월세 압박이 커졌다.
이처럼 연금, 주택, 일자리 등 중장년층과 청년층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분야와 관련해 전문가들은 ‘당장의 문제만 보지 말고 길게 보면서 소통하라’는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스웨덴 연금청의 보 셴베리 이사장은 “다음 세대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우지 않으면서 현 세대가 적정한 연금을 받을 수 있도록 사회적 타협을 이끌어내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유럽 연금체계의 문제점으로 그리스 아테네대 정치공공행정학과 디미트리 소티로풀로스 교수는 근로자의 수가 감소하면서 공적연금에 넣을 수 있는 돈의 절대 규모가 줄고 있는 점을 꼽았다. 이처럼 재정이 바닥을 드러내는 상황이라면 공적연금 비중을 줄이는 대신 사적연금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주택시장은 전 세계적인 저금리 현상으로 매수세가 크게 늘었다. 독일 코메르츠방크의 마르코 바그너 이코노미스트는 “은행에서 대출을 과도하게 받는다면 추후 이자율이 상승할 때 감당하기 힘든 ‘이자율의 덫’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중장기적인 공급 대책도 마련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영국 공공정책연구소의 조시 굿먼 연구위원은 “그린벨트 규제 완화 등을 통해 주택 공급을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민감한 노동개혁을 위해서는 노사 신뢰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조언이 많았다. 현재 독일에는 통합서비스 노조인 베르디 같은 대형 노조가 대화의 파트너로서 사회의 인정을 받고 있다. 독일 상공회의소 브리기테 쇼이얼레 직업교육국장은 “베르디가 경영진과 합의하면 노조가 없는 기업까지도 이 합의를 경영에 반영한다”고 말했다.
연금, 주택, 노동시장을 개혁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정치권이 포퓰리즘 성향의 정책을 경쟁적으로 쏟아낼 경우 갈등이 다시 커질 수 있다. 김재한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는 “선거가 이해당사자 간 소통을 활발히 해 세대 간 간극을 좁히는 창구 역할을 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 한국 청년인턴-임금피크제 “눈에 띄네” ▼
세대갈등 대응책 발빠른 도입… 취업연계형 청년인턴 英도 관심
“충분한 사전검증 거쳐야” 지적도
연금 일자리 주택시장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이른바 ‘선진제도’를 초스피드로 도입해온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충분한 검증을 거치지 않은 채 제도 도입만 너무 서두르면 세대 갈등을 증폭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8일 기획재정부 등에 따르면 정부는 청년일자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청년인턴제도를 일찌감치 운영해 왔다. 올 7월 발표한 ‘청년 고용절벽 해소 종합대책’에선 청년인턴제도를 우수 중소기업이나 중견기업에까지 확대하고 취업 연계형으로 재설계하는 등 제도 수준을 한 단계 향상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해 청년(15∼24세) 실업률이 16.3%에 달하는 영국 역시 청년인턴제도에 대한 관심이 높다. 영국 정부, 시민단체들에 따르면 기업이 청년들을 고용하지 않는 이유로 ‘경험 부족’을 꼽는 곳이 많았다. 공공정책연구소(IPPR) 조시 굿먼 연구위원은 “사회에 처음 진입하는 청년들이 처음부터 경력을 쌓을 수는 없다”며 “정부가 월급을 주는 조건으로 청년들을 민간기업에 보내 일을 시키면 회사는 비용이 절감되고 청년들은 경험을 쌓는 기회를 갖게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청년인턴이 고용으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청년층이 비정규직에 머무는 기간을 늘리는 데 일조할 수 있다는 부작용 때문에 영국 정부는 제도 확산 여부를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
노인들이 집을 담보로 맡기고 연금을 받는 ‘주택연금제도’는 공적연금 개혁이 추진되는 가운데 노인들의 노후를 보장해줄 수 있는 방안으로 꼽힌다. 미국에서 시작된 제도를 한국은 2007년부터 본격 도입해 현재는 노년층에 널리 확산되고 있다.
임금피크제와 관련해선 독일 상공회의소 브리기테 쇼이얼레 직업교육국장은 “장년층에 대한 공경심을 중시하는 아시아권에서 이런 정책이 나오는 것이 신기하다”고 말했다. 반면 한국이 직업교육의 모델로 삼는 독일식 일학습병행제에 대해선 신중한 접근을 당부했다. 그는 “정부 주도로 급하게 제도를 설계하면 일하면서 배우는 취지를 살리기 어렵다”며 “기업 현장의 목소리에 정부가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팀장
하임숙 경제부 차장 artemes@donga.com
▽팀원
프랑크푸르트·쾰른·파리=홍수용 경제부 기자
런던·스톡홀름·삿포로=손영일 경제부 기자
아테네·밀라노=김준일 경제부 기자
김철중 경제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