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황광해의 역사속 한식]김치

입력 | 2015-11-10 03:00:00


황광해 음식평론가

김치가 우리의 ‘전통 음식’이라는 표현은 맞다. 하지만 우리 ‘고유(固有)’의 음식은 아니다. 우리만 먹었던 것은 아니다. 김치 혹은 김치류의 음식은 중국과 일본에도 있었고 지금도 남아 있다.

김치가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은 2600년 전의 기록인 ‘시경’이다. “밭둑에 오이가 열렸다. 오이를 깎아 저(菹)를 담그자”라는 내용이다. ‘저(菹)’는 김치다. 오이김치다. ‘여씨춘추(呂氏春秋)’에는 “공자가 저를 먹느라 콧등을 찌푸렸다. 3년을 먹고 나니 적응이 되어서 수월했다”는 기록도 있다. 공자의 멘토는 주나라 문공(文公)이다. 주나라 문공이 저를 먹었으니 공자도 따라했다. 주나라 문공은 지금으로부터 2700년 전 사람이다.

다산 정약용의 벼슬살이는 짧았다. 불과 10년 남짓, 1789년에서 1800년 사이다. 다산은 황해도 해주에서 과거 고시관 노릇을 했다. 이때 남긴 시가 ‘다산시문집’(3권)에 남아 있다. ‘장난삼아 서흥도호부사 임성운에게 주는 시’에 “납조냉면에 숭저가 푸르다(拉條冷면숭菹碧)”는 구절이 있다. ‘숭(숭)’은 배추, 저(菹)는 김치다. ‘숭저’는 배추김치다. 다산의 시대에는 오늘날의 봄동 혹은 얼갈이배추 같은 품종이 보편적이었을 것이다. 잎이 푸르니 “배추김치가 푸르다”고 표현했다. 시경과 공자의 저와 다산시문집의 저는 같다.

우리 기록에는 김치를 ‘지(漬)’ 혹은 저로 표현했다. 고려시대의 기록에는 지로 표현하다가 조선시대에는 대부분 저라고 했다.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에서 김치 담그는 것을 ‘염지(鹽漬)’라고 했다. (채소 등을) 소금물에 담근다는 뜻이다. 엄격하게 나누자면 지와 저는 다르다. 지는 채소 등을 소금, 물, 향신료를 넣어서 삭힌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바로 그 김치다. 저는 시간을 두고 삭힌 것이 아니라 식초 등을 넣고 비교적 빨리 삭힌 것이다. 서양의 피클과 비슷하다. 사용하는 식초는 초산이다. ‘원형 한반도형 김치’는 지다. 저와는 다르다.

지 대신 저로 표기한 것은 조선시대 유교의 영향이리라 짐작한다. 유교를 숭상했던 조선시대의 관리, 학자들이 우리 고유의 지 대신 중국식 표기인 저로 표현했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겉절이’ 혹은 ‘겉절이 김치’라고 표현하는 음식부터 서양식 피클, 초절임 음식들이 저다. 우리의 지와는 다르다.

조선 중기 문인 김장생의 ‘사계전서’ 제41권 ‘시제(時祭)’에는 “이른바 세 가지 소채(蔬菜· 채소)라는 것은 침채(沈菜)와 숙채(熟菜)와 초채(醋菜) 따위가 그 속에 포함되는 것이니”라고 했다. ‘초채’는 ‘초+채소’로 초절임 음식이다. ‘침채’ 즉 김치가 지라면 초채는 저다. 16세기 무렵에 ‘초절임 채소=저’와 ‘김치=지’를 다르게 표현했다.

김치의 주요 요소인 배추 무 고추는 모두 외부에서 전래된 것이다. 다산은 ‘죽란물명고(竹欄物名考)’에서 “숭채(숭菜)는 방언으로 배초(拜草)라고 하는데 이는 중국 백채(白菜)의 와전이며, 내복(萊복)은 방언으로 무우채(蕪尤菜)라고 하는데, 이것은 무후채(武侯菜)의 와전”이라고 했다. ‘무후채’는 ‘촉의 무후’ 제갈공명이 즐겨 먹었다고 붙인 이름이다.

중국에는 ‘중국 김치’라고 부르는 ‘자차이(+菜)’가 있다. 일본인들은 지금도 여러 종류의 ‘쓰케모노(漬物)’를 먹는다. 모두 채소 발효식품으로 김치와 비슷하다. 일본 ‘쇼소인(正倉院)문서’에 “한반도에서 김치가 전래되었다”고 했다거나 중국에서 배추, 결구배추, 무가 한반도로 전래되었다는 내용은 의미가 없다. 한반도의 김치는 지속적으로, 다양하게 발전했고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음식이 되었다. 김치의 ‘힘’은 끊임없는 변화, 발전에 있다.

채소에 젓갈을 더하기도 하고 더러는 고기 삶은 국물을 더하기도 한다. 생선을 통째로 넣기도 하고 곡물을 갈아 넣고 날고기를 썰어 넣기도 한다. 조선 후기에 이미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김치를 만들어 먹었다. 1670년경의 ‘음식디미방’에는 오늘날에도 만나기 힘든 ‘꿩고기짠지’가 나타난다.

실학자 이덕무(1741∼1793)는 ‘청장관전서’에서 “감기에다 기침, 콧물까지 겹치어 견딜 수가 없으며, 게다가 다리에 힘이 없어 마치 파김치처럼 늘어지는구려”라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축 처지면 ‘파김치’라고 했던 것도 재미있다. 김치는 늘 우리 곁에 있었다.

황광해 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