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복암리 고분 발굴 20년, 새롭게 조명되는 학설
20년 전인 1995년 11월 발견된 전남 나주시 복암리 3호분 96석실 내부(위). 마한 고유의 매장법인 항아리로 만든 옹관들이 놓여 있다. 복암리 고분군은 4개의 고분이 근처에 모여 있다(아래).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제공
○ 마한의 숨결 1500년을 뛰어넘다
“어어어, 안에 뭐가 있다!”
당시 복암리 3호분은 인근 마을 문중의 선산(先山)으로 100년 넘게 쓰였다. 전남도 지정 문화재가 된 뒤 발굴이 아닌 복원 정비를 위해 봉분 상단에 매장된 문중 묘를 옮기는 과정에서 3호분이 우연히 발견된 것이다. 임 교수는 “복원 공사를 채근하던 지방자치단체를 설득해서 발굴로 전환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며 “고(故) 한병삼 국립중앙박물관장께 직접 현장을 보여드린 뒤에야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임영진 전남대 교수(오른쪽)와 제자인 오동선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가 복암리 3호분 앞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나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1998년까지 3년간 발굴이 진행된 복암리 3호분에서는 옹관묘 22기와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묘) 11기 등 무려 41기의 매장시설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3∼7세기에 걸쳐 수십 개의 무덤이 3층으로 조성돼 ‘아파트형 고분’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특히 1996년에 조사된 ‘96석실’에서는 같은 시기 백제에서 찾아볼 수 없는 대형 옹관 4기를 비롯해 금동신발, 마구류 등이 쏟아져 나왔다. 이때부터 4세기 중엽 백제 근초고왕에 의해 전남지역이 점령됐다는 사학계의 통설에 의문이 제기됐다.
문헌사학계 다수는 “서기 369년 백제 장군 목라근자(木羅斤資)가 심미다례(沈彌多禮) 등 영산강 일대 국가들을 정복했다”는 내용의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에 근거해 4세기 중엽부터 백제가 나주 일대의 마한 소국들을 지배한 것으로 보고 있다. 마한이 중국에 사신을 보냈다는 중국 진서 기록이 290년까지만 확인된 것도 근거로 든다. 이에 따라 백제 금동신발이 출토된 복암리 고분 석실은 백제에서 파견된 관리가 묻힌 것으로 봤다.
이와 관련해 지난해 발굴된 인근 정촌 고분에서도 백제와 다른 양식의 석실이 발견됐다. 백제가 지배한 지역으로 간주하기 힘든 고고학 증거가 잇달아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문헌사학계에서도 4∼5세기 백제의 마한 지배는 수도에서 거주하는 지방 유력자들을 통해 백제왕이 다스리는 ‘간접 지배’ 형태였을 것이라는 학설이 대두되고 있다. 적어도 이 시기 백제의 직접 지배설은 점차 힘을 잃고 있는 셈이다.
나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