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하피첩’. 서울옥션 제공
“화(禍)와 복(福)의 이치에 대해서는 옛날 사람들도 오래도록 의심해 왔다. 충(忠)과 효를 한다고 해서 꼭 화를 면하는 것도 아니고, 방종하여 음란한 짓을 하는 사람이라고 꼭 박복하지만은 않다. 그러나 착한 행동을 하는 것은 복을 받을 수 있는 당연한 길이므로 군자는 애써 착하게 살아갈 뿐이다.”
선행을 하는 착한 사람이 반드시 복을 받는 것이 아니고, 악행을 저지르는 나쁜 사람이 반드시 벌을 받아 화를 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권선징악의 종교 사상에서 벗어나 있고, 인륜 도덕을 강조하는 유학(儒學)의 전통에서도 벗어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슬라보이 지제크도 이와 비슷한 의문을 표했다는 점이다. 히치콕의 영화를 분석하는 글에서였다.
지제크는 그것을 영국적 경험주의 전통과 연관 지어 생각한다. 영국적 경험주의에 의하면 모든 대상은 자신과 전혀 상관이 없는 외재적 관계망 속에 끼여 있는 존재이다. 히치콕의 세계에서도 주체의 행동과 무관한 운명의 우연한 개입이 주체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는다. 이때 그 운명은 물론 주체의 내재적 속성과 아무 관계가 없다. 이것이 바로 영국의 경험주의가 대륙적 전통과 대립되는 지점이라고 지제크는 생각한다. 대륙적 전통은 한 대상의 외부적 발전이 바로 그것의 내재적 잠재성의 설명이라고 상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구원은 개인의 선행에 달려 있지 않고 오직 신적인 은총으로 외부에서만 올 수 있다는 얀센파의 교리도 있다. 자신이 신의 은총을 받았는지 어쩐지 알 수 없으므로 여하튼 선행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파스칼의 ‘내기’(도박) 이론도 있다. 어쩌면 다산의 수수께끼 같은 글은 그의 천주교 신앙의 어떤 내밀한 흔적인지도 모르겠다.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