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해 음식평론가
‘연포탕(軟泡湯)’의 ‘포(泡)’는 거품이다. ‘연포’는 연두부다. 두부를 만들 때 거품이 인다. 두부를 ‘포’라고 불렀다. 초계군수 입장도 난처했으리라. 벼슬이 끊어진 백의종군 신세지만 전직 삼도수군통제사다. 대접할 수도, 모른 척할 수도 없다. 귀한 연포탕을 준비했지만 얼굴은 떨떠름하다.
두부의 이름은 여러 가지다. 다산 정약용은 ‘아언각비’에서 “두부의 이름은 본래 백아순(白雅馴)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포(泡)라 했고 또 다른 이름은 숙유(菽乳)”라고 밝혔다. ‘숙(菽)’은 콩이다. 숙유는 ‘콩 우유’ 즉, 두유다. 두유로 두부를 만드니 숙유라고 불렀음 직하다. 두부는 ‘두포(豆泡)’라고도 했다. 역시 콩, 거품의 의미다.
두부는 연포탕을 통하여 맛있는 음식으로 발전한다. 고려 말의 목은 이색은 두붓국과 지진 두부를 먹었다. 단순하다. 이색은 ‘목은시고’ 제33권에서 “오랜만에 만나는 두부가 마치 갓 썰어낸 비계 같고, 성긴 이로 먹기에도 그저 그만”이라고 했고, 제9권에서는 ‘두부와 토란을 섞은 반찬’을 이야기한다. 조선 전기의 문신 서거정도 ‘사가집’에서 “서리 빛보다 흰 두부를 잘게 썰어 국을 끓이니 부드럽고 향기롭다”고 했다. 두부를 넣은 평범한 국이다. 홍만선의 ‘산림경제(山林經濟)’에는, 두부를 잘게 썰어 서너 개씩 꿴 다음, 흰 새우젓갈을 섞은 물에 넣고 끓이되 굴(石花)을 더한다고 했다. 새우젓갈, 굴이 있으나 고기는 없다. 추사 김정희의 ‘대팽두부(大烹豆腐)’에도 “가장 맛있는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나물”이라고만 했다. 차별화된 두부 맛은 말하지 않는다.
두부는 진화한다. ‘프리미엄 연포탕’은 닭고기와 기름에 지진 두부를 닭고기 국물에 넣고 끓인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다산시문집(제7권)-절에서 밤에 두붓국을 끓이다’에서 “다섯 집에서 닭을 한 마리씩 추렴하고, 주사위처럼 썬 두부를 띠 풀에 꿰어 준비한다”고 했다. 닭고기가 들어간 프리미엄 연포탕이다. 숙종 7년(1681년) 6월에는 ‘암행어사의 연포탕’이 문제가 된다. 영의정 김수항의 탄핵에 따르면 “암행어사 목임일은 (평안도) 찰방, 적객(謫客) 등과 어울려 산사로 돌아다녔고 연포회를 베풀었다.” ‘적객’은 귀양살이 온 사람이다. 암행어사가 공무원(찰방), 적객과 ‘프리미엄 연포탕’을 즐겼으니 중죄다. 조선 후기 홍석모의 ‘동국세시기’(1849년)에는 시월의 음식으로 연포탕을 꼽는다. 두부를 잘게 썰어 꼬챙이에 꿰서 지진 다음 닭고기와 함께 끓인 것이다.
우리는 맛있는 두부를 먹었던 민족이다. 허균은 ‘도문대작’(1611년)에서 “창의문(자하문) 밖의 두부가 맛있다”고 차별화했다. 세종 때는 중국으로부터 “두부와 반찬 잘 만드는 여인들을 보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일본의 고급 두부, ‘당인두부(唐人豆腐)’는 경주 출신 박호인이 만들기 시작했다는 ‘설’도 있다.
이제 맛있는 두부를 잃어버렸다. 중국에는 ‘취두부(臭豆腐)’ ‘모두부(毛豆腐)’ 등 발효두부가 남아 있다. 일본의 두부 종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우리만 ‘물에 담아 포장한 두부’로 찌개를 끓이거나 지져 먹는다. 고려 말의 두부 수준이다.
황광해 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