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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허문명]광화문 거리시위와 이애주 선생

입력 | 2015-11-20 03:00:00


허문명 국제부장

지난 토요일 아침 파리 테러 소식을 듣자마자 파리 특파원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부터 물었다. 긴장된 목소리에서 공포와 불안이 느껴졌다. 카톡으로 보내 온 현장 사진들은 끔찍했다. 총탄으로 깨진 유리창, 피가 흥건한 도로, 핏빛 신발들…. 금요일 밤을 즐기던 무고한 시민들은 식당에서 축구장에서 공연장에서 이슬람국가(IS) 테러범들에게 무참히 쓰러졌다.

공교롭게도 이날 서울 광화문 도심은 ‘민중총궐기’ 시위로 아수라장이었다. 종편을 통해 생중계된 시위 현장은 특파원이 보낸 테러 현장 이미지와 오버랩이 되면서 무질서와 폭력의 살풍경으로 느껴졌다. 한국이 총기 사용에 엄격한 나라였기에 망정이지 저들에게 총이라도 주어졌더라면… 생각하기조차 싫은 끔찍한 일이다. 시대는 21세기 초입에 접어들며 선진국 진입을 목전에 두고 있건만 저들은 어찌해서 1980년대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일까?

며칠 전 잘 알고 지내던 이애주 선생과 오랜만에 만나 쌓인 이야기들을 나눈 적이 있다. 그는 1980년대에서 90년대를 거치며 아스팔트 현장을 주름잡던 춤꾼이자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 중 하나다. 민주화운동 시위가 거리를 가득 메웠을 당시 국립대학(서울대) 교수이자 춤꾼으로 박종철(서울대 고문치사 사건으로 사망) 이한열(연세대 재학 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 등 대학생은 물론이고 분신 노동자들까지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을 춤으로 달랬던 사람이다. 그의 거리 춤은 사람을 모으고 격동시키며 시위대를 고조시켰다.

워낙 유명 인사였다 보니 여야 할 것 없이 국회의원 시켜 주겠다, 당을 만들자 제의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이 생길 때에도 많은 좌파 문화인들이 그랬듯 자리(?)를 챙길 법도 했건만 “비슷한 생각 가진 사람들끼리 조직만 만들면 뭐 하나. 이럴 때일수록 공부하고 연구해서 기본 바탕부터 다져야 한다”고 손사래를 쳤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한때 그와 인연을 맺었던 80년대 운동권들이 새로운 권력을 만들던 시절에 그는 침잠의 길로 들어선다. 우리 전통춤의 원형을 복원하기 위해 공부에 몰입하기 위해서였다. 어떤 이들은 ‘이애주가 변했다’느니 ‘민중과 민주를 떠났다’느니 손가락질하고 비아냥대기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국 춤 연구와 제자 양성이라는 기본을 파고들었다. 그는 현존 유일의 승무 인간문화재이다. 이 선생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고구려 벽화 춤에서 우리 춤의 원형을 발견하기 위해 중국 동북방에 흩어진 고구려 무덤을 찾아다니고 전통춤의 하나인 영가무도(詠歌舞蹈·김항이 주창한 정역사상을 노래와 춤으로 표현한 전통예술이자 수행법)를 복원하기까지 이르게 된다. 요즘엔 국내 최고의 주역 대가로 알려진 대산 김석진 선생 문하에서 동양사상도 배우고 춤과 철학을 연결해 대학로에서 강의도 하고 있다.

선진국으로 가느냐, 여기서 주저앉느냐 하는 민족사적 기로에서 기업들은 미래 먹거리를 찾느라 생사를 건 싸움 중이다. 일부 젊은이는 ‘헬 조선’을 뇌까리고 있지만 다수 젊은이는 세계무대에 도전하기 위해 청춘을 불태우고 있다. 한미약품의 거짓말(?) 같은 신약 개발 및 기술 수출 쾌거와 음악계의 신동 조성진의 등장은 의미가 심대하다. 거리 시위 춤꾼 역할을 접고 진정한 한국춤의 이론을 정립하며 이를 세계무대에 알리는 게 꿈이라는 그와의 대화가 아수라장 같은 광화문 시위 함성보다 더 크게 다가온다.

허문명 국제부장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