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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진단]희생이 있어야 희망이 있다

입력 | 2015-11-23 03:00:00


외환위기가 시작된 1997년 말 고 김수환 추기경(오른쪽) 등 각계 지도자들이 ‘금 모으기 운동’ 행사에 동참하고 있다. 동아일보DB

고기정 소비자경제부 차장

1997년 오늘은 국제통화기금(IMF) 실무협의단이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한 날이다. 친구 K에게 이날은 가까스로 한 중견기업으로부터 입사 통지를 받은 날이기도 하다.

IMF 실무협의단은 곧장 재정경제원과 구제금융 지원 조건을 놓고 협상에 돌입했다. 열흘 만에 합의문이 나왔다. 자본시장 개방, 대기업 개혁, 경상수지 개선 조치 등을 담고 있었다. 가혹했다. 기업들은 군살을 빼는 구조조정을 해야 했다. 자기 회사를 평생직장으로 알았던 사람들이 창졸간에 군살로 내몰렸다.

K는 회사에서 ‘피를 먹는 나무’로 불렸다. 상사 수십 명이 회사를 나갔다. 해고 사실을 차마 집에 알리지 못한 이들은 아침이면 양복을 입고 산에 올라 소주를 목에 털어 넣어야 했다. 신입들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해고 대상이 줄었을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그땐 모두가 제일은행 직원이 제작한 ‘눈물의 비디오’의 주인공이었다.

K는 1년간 보너스는커녕 본봉의 80%만 받았다. 그래도 졸업과 동시에 실업자가 된 친구들보다는 나았다. 유학 갔다가 아버지 사업이 망해 중도에 돌아왔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몇 년 뒤에는 그나마 연령 제한에 걸려 취업 기회를 아예 놓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인생 자체가 뒤틀려 버렸다.

외환위기는 한국의 암흑기였다. 요즘 말로 하면 ‘원조 헬조선’이다. 하지만 K와 선배 동료들은 그 지옥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4년이 채 못 돼 IMF 관리체제를 조기 졸업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고통을 감내할 수 있었다고 하면 그 세대에 대한 모욕이다. 기업 오너들은 회사를 살리기 위해 사재를 내놓았고, 가계는 나랏빚을 갚기 위해 장롱 속 반지를 내놓았다. 모두가 희생했다. 그래서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IMF 체제 졸업은 희생의 결과물이지 전제가 아니었다. 암흑의 터널이 언제 끝날지, 과연 끝날 수는 있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이제 40대 중반이 된 K는, 비록 그동안 단 한 해도 ‘경제위기’가 아니라는 말을 들어보진 못했지만, 그 거칠고 험한 18년을 그럭저럭 잘 넘기며 부장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그의 회사는 올해가 가기 전에 인력 구조조정을 마쳐야 한다며 그에게 사직을 권고하고 있다. K는 이번에는 희생할 뜻이 없다. ‘어떻게 이 자리에 왔는데…’라는 생각에서가 아니다. ‘왜 나만 독배를 들어야 하느냐’는 억울함 때문이다.

공공부문은 지금도 여전히 고용 안정의 보호막 아래에 숨어 있다. 공무원연금 개혁은 무늬만 개혁일 뿐 일반 월급쟁이들이 보기엔 눈 가리고 아웅 식이었다. 기업들은 상생을 외치지만 외환위기 이후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상생의 고리는 구조적 단절 상태다. 대기업이 글로벌 소싱과 글로벌 판매를 강화하면서 생산과 이윤의 독점화가 심화된 때문이다. 강성 대기업 노조 역시 한 발짝도 물러나지 못하겠다는 태세다. 이들도 각자 할 말은 많지만 결국은 내 밥그릇 못 내놓겠다는 것이다. 남은 건 겉만 번지르르한 사무직 화이트컬러, 평생 고용불안에 시달려야 하는 비정규직 근로자, ‘n포 세대’라고 자조하는 취업준비생들이다.

외환위기 때 확인했듯 희망은 희생에서 싹튼다. 다만 그 희생은 공평하고 공정해야 한다. 환란은 간밤의 도둑처럼 급작스레 찾아와 모든 것을 빼앗았지만 지금의 불황과 침체는 그 시작과 결과를 우리 대부분이 알고 있다. 그럼에도 청와대가 4대 개혁이 급하다면서도 역사 교과서 문제로 편을 가르고, 민주노총이 10만 명을 광화문 앞에 불러 모아 놓고 경찰차를 때려 부수고, 기업들이 여전히 진심으로 상생의 의미를 구현하지 못한다면, 우리를 기다리는 건 예정되고 오래된 미래일 뿐이다. 이는 그 누구도 그 결말을 원치 않지만 그 누구도 희생하지 않는 사회가 떠안아야 할 비극이다. 우리는 18년 전의 공평하고 공정한 희생을 다시 한 번 할 수 있는 준비가 돼 있을까. 이를 통해 새 희망을 쏘아 올릴 수 있을까. 그러지 못할 것 같아 안타깝고 답답하다.

고기정 소비자경제부 차장 k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