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前대통령 서거]한국 정치사에 큰 발자국
경남중 시절
1945∼1947년 경남중학교 재학 시절의 YS.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정치적 고비마다 승부수를 던졌다. 복잡 미묘한 정세를 단순화해 정면 돌파하는 YS 스타일은 ‘결단의 리더십’으로 불렸다.
그의 정치 입문은 화려했다.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에서 만 26세의 나이로 당선됐다. 역대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아직까지도 이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이후 1992년까지 38년간 의정 활동을 하며 최다선인 9선 의원을 지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와 고 박준규 전 국회의장만이 9선의 반열에 올랐다.
1970년 ‘40대 기수론’
YS(오른쪽)가 7대 대선을 앞둔 1970년 ‘40대 기수론’을 외치며 유진산 신민당 당수(왼쪽)와 만나고 있다.
YS는 1965년 38세에 통합 야당인 민중당의 최연소 원내총무를 지냈고 제1야당의 원내총무만 5차례 지내는 진기록을 남겼다. 40대 기수론을 제창하고 나선 1970년 전당대회에선 선두를 유지하다가 막판에 김대중(DJ) 당시 후보에게 져 쓴잔을 마셔야 했다. 이후 1974년에는 47세로 최연소 야당 총재가 됐다.
YS의 좌우명은 ‘대도무문(大道無門)’이다. YS는 평소 이 문구를 휘호로 쓰면서 “모든 일에 정당하다면 거리낄 게 없다”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그가 걸어온 길도 그랬다.
1979년 의원직 제명
YS가 1979년 10월 4일 서울 동작구 상도동 자택에서 국회의원직 제명 관련 동아일보 기사를 보고 있다.
1979년 YS는 당시 박정희 정권과의 전면전을 선포했다.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지미 카터 정부는 박정희 정권 지지를 철회하라”며 한국 지원 중단을 요구했다. 발끈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YS는 그해 9월 의원직에서 제명됐다. 헌정사에서 현직 의원이 제명된 것은 처음이었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라는 경고가 나온 것도 이때다.
YS의 의원직 제명은 그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 마산에서 부마항쟁을 촉발했고, 박정희 정권을 종말로 이끈 10·26사태로 이어졌다.
1983년 반독재 단식 투쟁
YS는 1983년 5월 5공 독재에 항거해 23일간 목숨을 건 단식 투쟁을 벌였다.
전두환 정부 출범 이후 YS는 또다시 대정부 투쟁의 불씨를 지폈다. 그는 1983년 5월 18일 5·18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아 야당 인사 석방, 민주 회복, 정치 복원 등 ‘민주화 5개 항’을 요구하면서 23일간 단식투쟁에 나섰다. 당시의 억압적인 분위기에서 YS의 단식은 ‘최근 정치 현안’이라는 알쏭달쏭한 표현으로 회자됐다. YS의 목숨을 건 단식은 민주화 운동을 수면으로 끌어올리는 기폭제가 됐다.
이 불씨는 1985년 2·12총선에서 신당 돌풍으로 살아났다. YS는 DJ와 손잡고 민정당 정권에 일격을 가하고 신당인 신민당을 원내 제2의 정당으로 만들었다. 신당 카드는 YS가 주로 밀어붙인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민정당 2중대’ 소리를 들었던 민한당은 와해되기 시작했다. 신민당은 이후 직선제 개헌 투쟁의 선봉에 나섰고,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산파역이었다.
또 다른 승부수는 1990년 3당 합당이었다. 2년 전 총선에서 3당으로 전락하자 YS는 노태우-김종필을 아우르는 보수 대연합의 3당 합당으로 반전을 시도했다. 당시 민주화 세력은 “군부 세력에 대한 야합이자 변절”이라고 YS를 비난했다. YS는 “호랑이를 잡기 위해선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한다”며 비난을 일축했고 결국 여권의 대선 후보를 거머쥐었다. 그는 집권 후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 척결 등을 밀어붙였다.
강경석 기자 coolu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