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간 목숨 건 단식 없었다면 80년대 민주화운동 가능했을까 노동법 날치기로 정권 잃어? 그때 노동개혁 제대로 했다면 외환위기 안 겪을 수도 있었다 세계화·개방화·유연화 시대정신 ‘반대’전문 강경좌파 누가 키웠나
김순덕 논설실장
1983년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이던 이채주 화정평화재단 이사장은 저서 ‘언론통제와 신문의 저항’에 이렇게 썼다. 전두환 정권에 의해 가택연금을 당한 김영삼(YS)이 정치민주화를 요구하며 단식투쟁 중이었다. 언론은 YS의 이름도, ‘단식’이라는 말도 쓰지 못했다. 그때 기자 지망생이었던 내가 보도지침을 어기면 안기부로 연행된다는 기막힌 현실을 알 리 없었다.
이 국장은 보도지침을 무시하기로 결정했다. ‘YS 단식 23일 만에 중단’ 기사를 그날 1면 중간 5단 크기로 놓고 톱기사 제목으로 ‘정치해금안(解禁案) 최대쟁점’을 시커멓게 뽑았다. 다음 날 ‘야(野), 모든 분야 민주화 촉구’ 기사는 더 크게 보도했다. 민주화를 거부할 수 없는 화두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당시 미국에 머물던 김대중(DJ)과의 정치적 연대가 복원된 것도 YS의 단식이 계기였다. YS와 DJ 측근은 단식투쟁 1주년에 맞춰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발족시켰고, 1985년 2·12 총선에서 야당 돌풍을 일으켰다. 1986년 총선 1주년에 맞춰 개헌서명운동을 시작하면서 DJ의 ‘100만 서명운동’ 제안을 “1000만 서명운동으로 하자. 누가 세어 보겠느냐”고 통 크게 바꾼 사람도 YS였다. 우리가 누리는 민주화가 지금 잘난 척하는 야권만의 힘으로 된 게 아니란 말이다.
“호랑이 잡으려고 호랑이굴에 들어갔다”고 해도 그게 쉽지 않다는 건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을 보면 안다. “YS는 못 말려”라는 유행어가 나올 만큼 누구도 못 막는 투쟁성과 결단력을 갖춘 ‘정치 9단’도 대통령이 된 뒤 경제는 뜻대로 못한 걸 보면, 정부가 시장을 못 이긴다는 교훈도 유효하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고 했다가 보복당했듯이 대통령이 기업을 쥐락펴락할 순 있다. YS도 꼼짝 못한 건 이념으로 무장한 노동계였다.
20일 한국노총 김동만 위원장은 노동개혁 입법을 중지하라며 “정부와 여당은 1996년 12월 노동법 파동 때도 합의되지 않은 내용을 날치기했다가 결국 정권이 교체됐다는 사실을 역사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라고 준엄하게 경고를 날렸다.
하지만 그가 말하지 않은 대목이 있다. 노동계가 사상 초유의 총파업이라는 정치투쟁으로 맞서는 바람에 YS가 항복하고 1997년 3월 새 노동법을 처리했으나, 그해 말 외환위기가 닥쳐 결국 또 고쳐야 했다는 사실 말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정리해고제를 넣어 노동시장 유연성을 높인 노동법을 다시 만들겠다고 약속하기까지 구제금융을 주지 않았다. 재개정한 노동법은 YS 때의 그 노동법과 거의 같았다. 그때 제대로 노동개혁을 했더라면 외환위기도, 정권교체도 없었을지 모른다는 얘기다.
그러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외면한 채 이념 편향적, 극단적으로 달려가는 노동계의 이기적 행태는 그때나 지금이나 한 치도 달라지지 않았다. 어제 새벽 저세상으로 간 YS가 DJ를 만나면 물어봤으면 좋겠다. DJ가 대통령 된 뒤 왜 그리 민주노총 위원장을 노동부 장관 이상으로 대접해 줬는지, 이젠 전 국민이 노동자의 10%밖에 안 되는 노조의 노예처럼 될 판이라는 걸 알고도 그랬는지를.
“군부독재 타도”만 부르짖으면 이념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민주투사로 인정해 주던 시절, YS는 행복한 투사였다. 행정부의 수반으로서는 유능하지 못했지만 사심 없다는 것 ‘학실(확실)하고’ 세계화 개방화 유연화 같은 ‘학실한’ 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는 시대적 역할을 ‘학실하게’ 해냈다. 삼가 명복을 빈다.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