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극인 도쿄 특파원
요즘 한일 관계는 분야를 가리지 않고 한국이건 일본이건 각자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한다. 한마디로 한일전의 연속이다. ‘감정 과잉’ 속에 폭투까지 때로 속출하고 있다. 무엇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그렇다. 이달 3년 6개월 만에 양국 정상이 만나 조기 해결에 합의했지만 만남 이후 일본 내에서는 ‘일본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이긴 거냐, 진 거냐’를 주제로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정상회담 준비 과정에서도 그랬지만 일본 언론은 정상회담 자체를 또 하나의 한일전으로 몰고 갔다.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만나봐야 의미가 없다는 박 대통령과 전제 조건을 붙인 회담에는 응할 수 없다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우여곡절 끝에 결국 만났는데 과연 이것이 누구의 승리냐는 시각이다. 실제로 일본 잡지들은 아예 ‘아베 총리는 박 대통령에게 과연 이긴 것인가’ 등의 제목으로 기사를 쏟아냈다.
더 가관인 것은 해결 시기에 대한 해석이다. 아베 총리는 “올해가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인 점을 염두에 둔다”고 전제했지만 일본 언론에서는 박 대통령의 바람대로 연내에 해결하면 ‘일본의 패배’라는 주장이 확산되고 있다. 이 때문에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관방장관은 “어디까지나 가능한 한 조기에 해결하고 싶다”는 애매한 말로 한국의 불신을 사고 있다. 일본 외교가 한쪽에서는 “설(구정) 기준으로 2월까지 해결하면 한일 간에 무승부가 되지 않겠나”라는 말까지 나온다고 한다.
이래도 저래도 승부에서 밀린다고 생각했는지 일본 정부는 언론을 통해 박 대통령 면전에서 주한 일본대사관 앞의 위안부 소녀상 철거를 요구했다는 일방적인 주장을 거푸 신문에 흘리고 있다. 쉽게 말해 한국에도 한 방 먹였다는 논리다.
위안부 문제뿐 아니다. 한국인 강제징용자의 한이 서린 일제 산업시설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할 때에도 역사에 대한 성찰은 빠지고 ‘한국에 이기느냐, 지느냐’는 구호만 난무했다. 지난달 열린 한일 재계회의에서도 한국이 화해의 상징으로 통화스와프 재개를 제안하자 일본 언론은 ‘아쉬운 한국의 패배’라는 승전고를 울리며 한국을 자극했다. 이처럼 모든 문제를 ‘닥치고 한일전’ 프레임으로 만든 데는 국내 정치 공학에만 매몰된 일본 정치인들의 책임이 크다.
일본도 한국에 할 말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여유를 잃은 요즘 모습은 안타깝다. 한국 야구대표팀 주장 정근우 선수가 “상대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 한다”며 도쿄돔에서 태극기 세리머니를 자제시켰다. 정근우의 그릇이 달리 보이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