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前대통령 서거]YS가 남긴 말말말
1996년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자신의 좌우명인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고 쓴 신년휘호를 보고 있다. 이 문구는 ‘올바른 길에는 거칠 것이 없다’는 뜻으로 중국 송나라 선승 혜개 스님이 수행의 이치를 담은 화두를 모은 책 ‘무문관’에서 비롯됐다. 동아일보DB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
(1979년 10월 헌정 사상 처음으로 국회의원에서 제명된 직후)
“민정당의 대통령 지명대회는 초상집에서 춤을 추는 격이다”
(1987년 국회 의사당 단식농성 중)
1987년 5월 박종철 고문 치사 및 축소·은폐 사실이 폭로됐을 당시 단식투쟁 중이던 YS가 민정당에 직격탄을 날렸다. 민정당이 6월 10일 노태우 대표를 차기 대선 후보로 지명하는 전당대회를 강행한 것을 비판한 것이다. YS는 노태우 민정당 후보를 “쿠데타 한 사람이 대권을 잡는 건 군정의 연장”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이던 YS는 노태우 대통령, 김종필 공화당 총재와 함께 3당 합당을 결행하면서 군사정권과의 합당이라는 비난에 이같이 응수했다. 결국 YS는 여권의 대선 후보가 됐고 1992년 대선에서 승리했다. 군부 세력과의 야합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문민정부의 문을 열었다는 평가도 있었다.
“우째 이런 일이…”
(1993년 민자당 최형우 사무총장 아들의 대입 부정 사건 소식을 듣고)
YS는 집권 첫해인 1993년 최측근인 최 사무총장 관련 사건을 접하고 말을 잇지 못했다. YS는 이후 “환부 하나를 찾아내 도려내면 또 나오고 또 나오고 한다”며 개혁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1994년 6월 16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의 긴급 전화통화에서)
1차 북핵 위기가 고조되면서 한반도는 전쟁 일촉즉발 상황까지 치달았다. 북한의 영변을 직접 폭격하겠다는 미국에 대해 YS는 클린턴 대통령과 직접 통화하며 설득했다. 그해 6월 김일성이 방북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에게 “핵을 동결할 용의가 있다”고 말한 뒤 사태는 일단락됐다.
“개가 짖는다고 달리는 기차가 뒤를 돌아볼 여유는 없다”
(1994년 ‘하나회’ 척결 등 개혁 반발 관련)
YS는 1994년 ‘개의 해’를 맞아 “개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 사랑을 받지만, 또 한편으로는 달리는 기차를 보고도 짖는다”라며 이렇게 말했다. 육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 척결 등 개혁 드라이브에 대한 반발을 겨냥한 말이었다.
“이번에 기어이 버르장머리를 고치기 위해 (한일) 정상회담도 갖지 말도록 지시했다”
(1995년 11월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YS는 에토 다카미(江藤隆美) 일본 총무청 장관의 망언에 분노하며 이렇게 밝혔다. 하지만 한일관계가 진전하는 단초도 마련했다. 앞선 1993년 3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국 정부가 직접 피해자를 지원하겠다”며 일본은 진상을 조사하고 그 결과를 후세에 교육할 것을 요구했다.
“아들의 허물은 곧 아비(아버지)의 허물로 여기고 있다”
(1997년 차남 현철 씨의 한보사태 이권 개입 의혹에 대해)
YS는 ‘소(小)통령’으로 통했던 차남 현철 씨가 수뢰 혐의로 구속되자 이 같은 내용의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후 YS는 레임덕(권력 누수 현상)에 빠졌고 그해 대선에서 김대중(DJ) 전 대통령에게 정권을 내준다.
“단식해봤지만 굶으면 죽는 것은 확실하다”
(2003년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의 단식 중단을 종용하며)
YS는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 비리 의혹 특검법 통과를 관철하기 위해 10일간 단식하던 최 대표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 YS는 전두환 집권 3년 차인 1983년 가택연금된 뒤 23일간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벌이며 신군부에 온몸으로 대항했다.
홍수영 gaea@donga.com·우경임·조숭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