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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인정교과서 실체는 민중사학의 비틀린 허위의식”

입력 | 2015-11-24 00:00:00

[신동아 12월호/특집 | 역歷/사史/내內/란亂]
격돌인터뷰 Ⅱ ‘국정화 찬성’ 이기동 동국대 석좌교수
● 국정교과서 찬성하면 원색적 비난, 인격 박탈
● 견강부회, 과장, 지적 사기 난무하는 민중사학
● 김일성 보천보전투 소개, 南 망신 주려는 의도
● 국편, ‘검인정 강화’에서 ‘국정화’로 돌변




“밤 12시나 돼야 집에 들어오신다. 그때 다시 전화해달라.”

원로 사학자 이기동(72) 동국대 석좌교수는 칠순을 넘긴 요즘도 늦은 밤까지 연구실에서 책 속에 파묻혀 지낸다. 자정을 넘긴 시간에 연결된 이 교수와의 전화 통화. 그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에 대해 통탄을 금치 못했다.

“지금 이 풍토를 보라. (교과서 집필 못하게) 협박하고, 위협하고…. 순수한 학문적 차원이 아니지 않은가. 역사교수라는 사람들도 다 당파심에서 출발한 거다. 노론 소론만 없을 뿐 조선 말 당파싸움보다 심하다. 국정교과서를 찬성한다고 하면 원색적인 비난에 인격까지 박탈하는 수준이다.”

이 교수는 이런 상황에 환멸을 느낀 듯 언론에 모습을 나타내기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당위성을 누군가는 설명해줘야 하지 않느냐’는 설득에 이틀 후 잠시 시간을 허락했다. 지방 세미나에 참석하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 사람들이 고쳐본들…”


이기동 교수는 고대사 분야의 권위자다. 근현대사에도 조예가 깊다. 30여 년 전 펴낸 ‘비극의 군인들’을 2년 반째 증보작업 중이다. 이 책은 1882년 임오군란부터 1945년까지 구한말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의 고위 장교들에 대한 기록으로 한일 근대사의 ‘비록(秘錄)’이다. 또 ‘전환기의 한국사학’ ‘민중사학론’ ‘민중문화 운동론’을 펴내는 등 국내 사학계 흐름에도 밝다.

이 교수는 1997년부터 9년간, 그리고 지난해 보궐로 위촉돼 올해 10월 25일까지 1년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기존 검인정교과서의 문제는 좌편향된 역사 기술보다 이를 집필한 민중사학자들의 비틀린 심리 상태라고 지적한다.

“가장 중요한 게 역사를 기술하는 저자의 심리와 정신 상태다. 민중사학 신봉자들은 전혀 공평하지 않다. 어려운 말로 ‘무단(武斷)’을 쓴다고 하는데 견강부회, 과장, 지적 사기, 거짓 등 사술(詐術)을 마음대로 쓴다. 그게 역사교과서 행간에 그대로 나타난다. 만약 앞으로도 검인정제를 유지한다면 필자는 내내 그 사람들일 것이다. 그 사람들이 고쳐봐야 얼마나 달라지겠나.”


▼ 검인정으로는 바로잡을 수 없을 정도인가.

“예를 들어 보천보전투 사건에 대한 서술에서 당시 보도사진을 뺐다고 해서 바로잡았다고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보천보전투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객관적인 위치를 봐야지. 보천보전투는 사건 자체가 초라하다. 당시 김일성 조직은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하부조직이었다. 중국이 자신들의 공산혁명을 위해 조선인인 김일성에게 청부 일감을 준 것이다.”

금성·동아출판·미래엔·천재교육 등 상당수 검인정교과서는 북한 김일성이 이끈 부대가 일제강점기에 함경남도 보천보를 습격해 승리한 전투를 당시 보도 내용과 함께 소개했다가 교육부로부터 일부 내용 수정 및 보완 권고를 받았다. 보천보전투는 북한이 김일성 우상화에 활용하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 김일성이 이 전투에서 승리한 건 사실 아닌가.

“이 사건을 왜곡하라는 것이 아니다. 크게 알릴 필요가 있느냐다. 임시정부와 같은 순수한 한민족 독립운동기관의 지령에 따라 움직인 독립운동과는 차별화해야 하는 것 아닌가. 역사를 기술할 때는 취사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이때 공평성이 결여되면 안 된다.

내가 가끔 허위의식이라는 말을 쓴다. 역사교과서는 우리 청소년의 정신, 그리고 영혼과 관련됐다. 그런데 남한을 적화통일하려는 김일성이 이런 엄청난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고 소개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나. 더군다나 사진까지 붙여가면서. 이건 남한을 망신주려는 허위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그걸 집필한 교수들은 대한민국에서 상위 5%에 들어가는 특권층이다.”

“교육정책 10년간 파행”

▼ 민중사학자들이란 어떤 사람들인가.

“19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 독일이 통일되고 소련 연방이 해체되는 등 사회주의가 몰락했다. 그런데 국내에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 급속도로 민주화하면서 이런 세계의 사조와 정반대 흐름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정치적, 사상적으로 큰 과도기에 들어선 것이다. 이번 국정 역사교과서 반대에 앞장선 한국역사연구회가 바로 6월 항쟁 이듬해인 1988년 당시 소장파 연구자들이 모여 만든 단체다.

이들은 ‘한국의 역사’라는 책과 ‘역사와 현실’이라는 기관지를 펴내면서 기존 역사학계에 정면 도전했다. 지금 보더라도 좌편향이 아주 심했다. 이들의 합동 연구 성과물은 10년 정도 곧잘 나오다가 이후 뜸해졌다. 그로부터 5~6년 후(2002년) 검인정 근현대사 교과서가 나오면서 그 단체에 소속된 교수와 중·고교 교사 등 30여 명이 대규모로 참여했다. 교과서 제작에 기존 역사학자들은 한 명도 참여하지 않았다.”

이기동 교수는 “정부가 당초 검토한 대로 검인정을 2종 정도로 강화했다면 지금처럼 여론이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 이유가 뭔가.

“교과서 검인정 과정이 불공정했다. 더구나 한국사에서 ‘근현대사’만 따로 분리한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고대에서 전근대까지는 ‘국사’(국정)로 놔두고, 근현대사를 다섯 배쯤 늘려서 독립과목으로 떼내 검인정제를 도입한 것이다. 근현대사가 없는 국사교과서가 말이 되나. 결국 할 수 없이 국사에도 근현대사 내용을 간략하게 붙였다. 그리고 국사는 필수, 근현대사는 선택으로 나눴다. 교육정책이 파행이었다. 그런데 그게 10여 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역사책 꼴이 우습게 됐다. 사학계에서는 교과서를 도외시했고, 그러다보니 방관 아닌 방관을 하게 된 것이다.”

김대중 정부 시기인 2002년 국사와 근현대사로 나뉜 역사교과서는 2010년 다시 ‘한국사’로 통합되면서 검인정제로 일원화했다. 그로부터 5년 만에 다시 국정화로 바뀌게 된 것이다.


▼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는데, 국정화에 대한 내부 논의는 없었나.

“9월 15일에 국무총리실에서 간담회를 한다고 해서 갔더니 역사학자가 7~8명 와 있었다. 나는 국정화에는 관심 없었다. 하지만 검인정 역사교과서로 학생을 가르치는 게 한심해서 ‘검인정 7종을 전부 합격시킨 것부터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이 ‘앞으로 2종만 합격시킬 것’이라고 했다. 검인정을 강화하겠다는 이야기였다. 만약 그렇게만 했으면 이렇게까지 여론이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검인정 강화를 고려했지만 국정으로 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교과서 쓸 사람 많다”

▼ 역사교과서 집필 요청을 받았을 것 같은데.

“여러 차례 제안 받았다. 10월 20일경 국사편찬위원회 마지막 회의가 있었다. 그때 위원장이, 고고학은 최몽룡 교수가 맡을 테니 나보고 고대사를 맡아달라고 했다. 그다음 날 집으로도 전화가 왔다. 하지만 사정이 있어서 어렵다고 거절했다. 30년 전에 쓴 책 증보작업에 2년 반째 목매는데, 교과서 집필에 참여하면 이걸 못하기 때문이다.”


▼ 사정이 없으면 맡았겠나.

“다른 일이 없더라도 솔직히 내키지 않았을 것 같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세력 때문에 그런 건 아니다. 내가 70살이 넘었다. 교과서 집필은 주로 40~50대 학자들이 하는 일이다. 또 책 전체를 쓰는 게 아니라 6분 1이나 7분의 1 쓰고, 그걸 또 다른 사람이 윤문한다니 자존심 상할 것도 같고. 교과서는 제약도 많다. 책을 사용하는 사람이 성장하는 학생들 아닌가. 교육적으로 훌륭해야 하고, 감동도 줘야 해서 굉장히 신경 쓸 게 많다. 그게 어렵다. 그에 비하면 논문 몇 편 쓰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 학계의 반대가 심한데 역사교과서를 제대로 만들 수 있을까.

“어느 대학에나 정치지향적인 교수들이 있다. 그 교수들이 찾아와서 서명을 부탁할 경우 동료들은 크게 손해 볼 게 없으면 후하게 찍어준다. 동료애라고나 할까. 서명에 참여한 사람 중에는 온건한 사람도 꽤 있다. 분위기가 안 좋지만, 교과서 쓸 사람은 많다.”


▼ 국사편찬위원회가 정부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 같은데.

“국가기구의 일부인데 벗어날 수 없는 건 당연하다. 내가 1997년부터 9년간 국편 위원으로 있었기에 그동안 일을 훤히 안다. 정치적인 영향이 많이 작용할 것이다.”


▼ 결국 나중에 또 다른 이념적 편향성 시비가 제기되지 않을까.

“랑케(‘역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독일의 역사학자)가 와서 역사교과서를 써도 약점 잡으려면 한도 끝도 없다. 물론 랑케라면 국내 역사학계에서 조사한 자료만 가지고는 ‘서술 불가’라고 할 것이다. 우리나라 학자들은 용감해서 실증자료가 없는데도 추리소설처럼 쓰는데, 상고사에 그런 대목이 많다. ‘실증사학’이라면 기술 불능한 수준이다. 그런데 현 정부가 상고사와 고대사를 강화한다는데, 그게 뭔가 심상치 않다. 요즘 재야 사가들이 부활했거든.”


▼ 재야 사가들?

“1980년대에 ‘국사찾기 운동’이라는 움직임이 있었다. 전두환 정권 말기였는데, 윤보선 전 대통령을 총재로 내세운 ‘국사찾기국민회의’라는 극우단체가 주도했다. 이들의 목소리가 커지니 정부에서 국사교육심의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때 내가 관여해서 잘 안다. 이들은 상고사에서 ‘단군신화의 역사성을 부각하자’ ‘한사군은 수치스러운 일이니 역사에서 빼자’고 주장했다. 그건 옳지 않은 일이다. 그때 국정을 검인정으로 전환하는 걸 부대 의견으로 달았다. 그런데 요즘 다시 그 움직임이 인다. 얼마 전 황우여 교육부 장관이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처하기 위해 역사교과서에서 상고사와 고대사 비중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는데, 그게 저들의 논리와 똑같다. 이것도 걱정이다.”


▼ 이번 국정 역사교과서 체제가 얼마나 유지될 것 같나.

“교사 개혁이 먼저”

“정권에 따라 달라질 것이기 때문에 솔직히 단명하리라고 본다. 다음 정권에서 또다시 3년마다 한 번씩 검인정 소동이 반복될 게 뻔하다. 걱정이다.”


▼ 근본적인 해법은 없을까.

“역사 교육에서 ‘다양성 확보’를 강조하는데, 사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교사의 재무장과 재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교과서는 가장 전형적이고 표준적인 것만을 뽑아놓은 것이다. 교과서에는 다양한 설을 다 제시할 수 없다. 그렇게 하면 혼란만 가중되기 때문이다.

교과서에 없는 다양한 시각과 설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 교사다. 결국 중요한 건 교사의 역할이라는 이야기다. 교사를 개혁하려면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 전교조 소속 교사가 전체 교사에 비해 소수지만, 적극적인 소수가 다수를 움직이는 게 우리 사회다.”



엄상현 기자 | gangpen@donga.com
<이 기사는 신동아|12월호 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