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아 12월호/史記에 길을 묻다] 흥망성쇠를 비추는 거울 ‘사감(史鑒)’ 때아닌 역사 전쟁이 한창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발단이 됐다. 정부가 “역사교과서가 편행됐다”며 다시 쓰겠다고 나선 것이다. 중국 최고의 역사서 ‘사기’에 등장한 최고권력자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이 바로 역사 평가다. 먼 훗날의 역사는 현 정부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까.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평가받는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누구보다 역사를 중시한 군주다. 특히 역사의 평가를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는 늘 옛 역사를 공부하며 자신의 통치행위를 반성했고, 남의 충고를 잘 받아들였다.
그는 통치 기간 내내 나라 다스리는 일을 신하들과 격의 없이 상의했다. 그런 덕분에 조정에서는 누구든 과감하게 직언하는 풍조가 마치 바람처럼 일어났다.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된 봉건적 전제정치 역사에서는 아주 드문 일이다.
이세민은 대신들에게 자주 이렇게 말했다.
이 말은 이세민이 적극적으로 간언을 구하고 받아들일 자세가 돼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는 신하들에게 할 말이 있으면 역린(逆鱗) 건드리기를 두려워 말고 용감하게 발언할 것을 독려했다. 또한 제왕과 신하를 물과 물고기의 관계로 보고, 덕행을 함께하고 더불어 천하를 다스리고자 했다.
제도적으로도 언로(言路)를 보장했다. 대소관원들의 직간 중에 취할 것은 취하고, 서로 연구하고 토론하며, 전횡과 폐정을 방지하기 위해 몇 가지 주요한 조치를 취했다. 건전한 논쟁과 반박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맹목적으로 황제의 뜻에 따라 시행하는 데 반대했다. 여론을 수렴하고 이를 솔직하게 전달하는 간관(諫官)을 중시했으며, 직간과 비방을 냉철하게 구별했다. 그래서 그가 통치하던 시기인 정관(貞觀) 연간에는 여론을 전달하고 직언하는 임무를 맡은 간관의 수가 대단히 많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걸출한 사람이 위징(魏徵)이다.
당 태종은 즉위 초에 수시로 위징을 침실까지 불러 치국의 득실에 대해 물었다. 몇 년 안 되는 짧은 기간 위징은 200여 건에 달하는 사안을 간언해 태종으로부터 큰 칭찬과 상을 받았다. 위징은 거리낌 없이 직간하고 이치에 따라 쟁론했으며, 때로는 황제의 체면도 살피지 않아 당 태종을 몹시 난처하게 만들기도 했다.
중국 시안시 당나라 거리의 조형물. 당 태종은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칭송받는다. 당 태종이 ‘인감(人鑒)’이라 부르며 자신의 언행을 바로잡는 거울로 삼은 위징.
銅鑒 史鑒 人鑒
한번은 조회를 마친 당 태종이 씩씩거리며 후궁으로 돌아왔다. 그러면서 “이 늙은이를 죽이고 말겠다”며 화를 냈다. 장순황후가 물었다. “누구 말입니까?” 태종은 “위징이 매번 조정에서 나를 욕보이지 뭡니까”라고 했다. 황후가 물러나 큰 행사 때나 입는 조복(朝服)을 갖춰 입고 뜰에 나와 서 있었다. 태종이 놀라 이유를 물었더니 황후는 “신첩은 군주가 밝으면 신하가 곧다고 들었습니다. 위징이 그렇게 곧은 것은 폐하께서 밝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신첩이 폐하께 어찌 감축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위징의 강직함을 긍정하는 동시에 태종의 영명함을 칭송하는 이 말에 그는 노여움을 풀고 오히려 기뻐했다.
당 태종은 자신도 잘못할 수 있다는 인식이 분명했다. 그는 자신에게 3개의 거울이 있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즉, 의관을 바르게 할 수 있는 동거울 동감(銅鑒), 흥망성쇠의 이치를 깨닫게 하는 역사의 거울 사감(史鑒), 직언으로 자신의 언행과 그 득실을 밝혀주는 ‘사람 거울’인 인감(人鑒)이 그것이었다. 이를 당 태종의 삼감(三鑒)이라 한다.
훗날 위징이 세상을 떠나자 태종은 “동감은 모습을 비춰주고, 인감은 득실을 알 수 있게 하는데 위징이 세상을 떴으니 짐은 거울 하나를 잃었도다”라며 슬퍼했다. 나머지 하나, 역사는 흥망성쇠의 이치와 통치의 잘잘못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그래서 현명하고 분별력 있는 통치자들은 예외 없이 역사의 평가를 두려워했다.
무측천(武則天)은 중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여황제다. 우리에겐 ‘측천무후’로 알려져 있다. 그는 강한 권력욕과 능수능란한 처신, 그리고 치밀한 정치적 수완으로 기어이 당 왕조를 멸망시키고 주(周) 왕조를 세웠다. 중국 역사에서는 대체로 무측천의 주 왕조를 그냥 지나친다. 그가 죽은 뒤 바로 당 왕조가 복구됐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당 왕조의 역사에 무측천을 포함한다.
무측천은 매우 잔인하고 사악한 여성으로 묘사돼왔다. 어느 정도 사실이다. 그는 천수(天壽) 원년인 690년 황제 자리에 오른 뒤부터 신룡(神龍) 원년인 705년 자리에서 밀려 내려오기까지 15년 동안 보좌에 앉아 집정했다. 꿈에도 그리던 목적을 달성한 그는 다른 통치자들과 마찬가지로 부패와 향락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인심을 잃는 일도 적지 않게 저질렀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통치와 정치행위는 적극적, 진취적이었다. 파격적인 인재 등용과 언로 개방, 잘못을 고칠 줄 아는 자세 등이 돋보였다. 균전제를 널리 실시하고 농업을 발전시킨 업적도 있고, 대외적으로는 변방의 우환을 방어하며 나라를 안정시킴으로써 보국안민의 사상을 실천에 옮겼다.
무측천은 황제에 오른 직후 정권의 안정을 다지기 위해 국가를 안정시키는 정책을 잇달아 제정하고 시행했다. 그 첫걸음이 인재를 널리 구해 기용하는 ‘광초현재(廣招賢才)’다. 이를 위해 그는 종래의 틀을 과감하게 깨고 새로운 인재 등용제도를 수립했다.
먼저 전시(殿試)라는 시험제도를 도입했다. 재초 원년인 690년 2월 14일, 그는 수도 장안(長安)에서 처음으로 전례가 없는 대규모 전시를 거행했다. 전국에서 올라온 인재들이 시험장을 가득 메웠고, 그가 직접 나서서 시험을 주관했다. 스스로를 추천하는 ‘자거(自擧)’ 제도도 처음 만들었다. 이 제도가 시행됨으로써 천하의 인재들이 출신을 불문하고 모두 능력을 자랑하며 스스로를 추천했고, 합격하면 바로 채용됐다.
유능한 무관을 선발하기 위한 ‘무거(武擧)’ 제도와 관리를 뽑는 ‘시관(試官)’ 제도를 맨 처음 시작한 것도 무측천이다. 이 밖에도 하층민 중에서 유능한 인재를 발탁하고, 제과(制科)를 개설해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뽑았다. 관원들에게는 유능한 인물 추천을 장려했다.
틀에 얽매이지 않는 무측천의 이러한 인재 등용제는 집권하는 동안 조정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는 원동력이 됐다. 새로운 얼굴이 쉴 새 없이 조정에 공급됨으로써 재상 적인걸(狄仁杰) 같은 걸출한 문무 대신이 출현할 수 있었다.
“재상의 과실이로다!”
무측천이 인재 등용만큼 중요하게 여긴 것은 언로 개방이다. 각 분야의 전문가로부터 의견을 듣고 자신의 잘못이 있으면 고치고, 좋은 의견은 받아들였다. 이것이 바로 ‘광개언로(廣開言路)’ 정책이다. 그의 그릇 크기를 엿볼 수 있는 사례들이 있다.
이경업(李敬業)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다. 무측천은 자신을 공격하는 격문을 보고 속으로는 열불이 났지만, 그 글을 쓴 사람이 누구냐고 태연하게 물었다. 임해승(臨海丞)으로 좌천된 원래 장안의 주부(主簿) 낙빈왕(駱賓王)이라고 누군가가 보고하자 그는 아쉽다는 듯 “이는 재상의 과실이로다! 어찌하여 이렇듯 걸출한 인재가 묻혀 있단 말인가”라며 혀를 찼다.
간관 주경칙(周敬則)은 무측천에게 글을 올려 가혹한 법보다는 은혜와 덕을 베풀어 천하 인민이 걱정 없이 편히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하라고 충고했다. 심기를 건드리는 대목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무측천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한편 숱한 죄를 지은 혹리 주흥(周興)과 내준신(來俊臣) 등은 과감히 처형함으로써 조야의 박수를 받았다. 또한 주경칙을 재상으로 발탁해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
무측천은 과학과 농업기술 등에도 관심이 많았다. 당나라 때는 농업이 국민경제를 떠받치는 유일한 경제적 토대였다. 당 태종 이세민은 성인 남자에게 일정한 땅을 나눠주고 일정 기간 경작하게 하는 균전제를 통해 농업 발전을 추진했다. 그런데 무측천이 집권할 무렵엔 균전제의 폐해가 극에 달했다. 토호나 사족들의 토지 겸병과 투기가 기승을 부리면서 농민은 땅을 잃고 도망자 신세로 전락했다.
즉위한 무측천은 즉각 토지 매매를 금지하는 조치를 취해 호족의 토지 겸병을 막았다. 아울러 새로 토지를 나눠주고 세금을 줄이는 등 각종 정책을 통해 도망간 농민을 생산 현장으로 복귀시켰다. 각급 관원에게는 농업을 특별히 중시하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농업에 방해되는 모든 활동을 엄격하게 금지하는 한편, 경작지 증감과 농작물 수확량 등을 상벌의 근거로 삼았다. 덕분에 농업은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사회는 안정을 되찾았다.
무측천은 국토를 온전히 보전하고 국경을 편하게 하는 데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이를 위해 그는 등극 2년째 되던 해 서주도독이자 명장으로 이름난 당휴경(唐休璟)으로 하여금 토번(吐藩)에 20년 넘게 침범당한 ‘안서(安西)의 4개 진’을 수복해 서부 변경에 대한 근심을 해소했다. 그 후로도 여러 차례 토번의 침입을 물리치는 한편 정주(지금의 칭하이)에 도호부를 두고 안서도호부와 함께 천산 남북을 나눠 관할했다.
중국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여황제 무측천(왼쪽). 무측천 시대의 걸출한 인물 적인걸은 무측천이 직접 발탁한 인재다.
‘황후’로 돌아간 ‘황제’
군사 방면에서 무측천은 자영 농민으로 병사를 충당하는 이른바 부병제를 계승하는 한편 이를 더 발전시켰다. 그는 군사력 비축에 중점을 뒀으며, 장수 등 군사에 필요한 인재를 기르는 데 특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덕분에 외족을 물리치고 강토를 보전한 걸출한 장수가 여럿 나왔다. 역사서에 등장하는 유명한 적인걸, 정무정, 당휴경, 왕효걸, 곽원진, 흑치상지(백제 출신), 배행검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705년 무측천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2세였다. 일대를 풍미한 통 크고 남다른 책략을 소유한 풍운의 여걸은 죽음을 앞두고 놀라운 결단을 내렸다. 그는 유언을 통해 자신의 황제 칭호를 떼내고 ‘측천대성황후(則天大聖皇后)’로 부르게 하라고 선포했다. 지고무상한 황제로서가 아닌 황후의 신분으로 돌아간 것이다. 황제로 남을 경우 역사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지가 무엇보다 두려웠던 것이다.
무측천이 죽기 전날 대신들은 뒷일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는데, 무엇보다 비문을 놓고 한바탕 공방이 벌어졌다. 그에 대한 평가가 쟁점이었다. 칭송하자는 신하들, 공과(功過)를 동시에 기록해야 한다는 신하들, 찬탈의 죄를 물어야 한다는 신하들 사이에서 논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무측천의 심경은 착잡했다. 죽음의 그림자를 붙들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긴 그는 “비석은 세우되 내용은 기록하지 말라”고 했다. 후대에 평가를 맡기자는 뜻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의 비석은 ‘무자비(無字碑)’로 남게 됐다. 죽는 순간까지 참으로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한 사람이었다. 역사상 수많은 제왕과 장상이 죽기 전 자신의 공덕을 잊지 못해 비석에다 자기 일생과 공을 새기도록 했다. 그러나 무측천은 글자가 없는 무자비를 세우라고 했으니 이것이야말로 그가 참으로 비범한 정치가임을 잘 보여주는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자신에 대한 평가를 역사에 미룬 그 담대함이란!
철완의 여황제로서 강력한 카리스마와 통치력을 발휘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그이지만 후대의 역사적 평가만큼은 두려웠던 것이다. 아무리 막강한 권력도 아무리 어리석은 통치자라도 역사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았다.
무측천의 무덤 건릉 앞의 ‘무자비’(왼쪽). 악비의 등에 ‘精忠報國’ 네 글자를 바늘로 새기는 그의 어머니.
‘혹 있을지도 모를 모반죄’
청나라 건륭 연간(1736~95년)에 장원급제한 항주 출신의 한 젊은이가 송나라 때 명장 악비(岳飛)의 무덤인 악왕묘(岳王墓)를 찾아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사람들은 송나라 이후부터 회(檜)라는 이름을 부끄러워했고,
나는 지금 그 무덤 앞에서 진(秦)이라는 성에 참담해하는구나.
1141년 명장 악비가 풍파정(風波亭)에서 아들 악운(岳雲)과 함께 억울하게 처형당한 지 약 600년이 지난 청나라 때, 장원급제한 젊은이가 어째서 악비의 무덤을 찾아 이런 시를 읊었을까. 이 젊은이는 악비를 모함해 죽이는 데 앞장선 간신 진회(秦檜)의 후손 진간천(秦澗泉)이었다. 진간천은 악비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역사의 대간신이자 자신의 조상인 진회의 부부상을 보며 치밀어 오르는 수치심과 감정을 참지 못하고 이런 글로 자신의 참담한 심경을 전한 것이다.
소흥(紹興) 3년(1133) 송나라 악비는 악가군(岳家軍)을 이끌고 빼앗긴 땅과 성을 차례로 수복해 금나라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특히 주선진(朱仙鎭) 전투에서 대승함으로써 금나라 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다. 금나라의 장수 금올술(金兀術)은 싸울 의욕을 잃고 그저 안전하게 북방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악비는 “여러분과 함께 통쾌하게 마시리라”며 곧장 금나라 수도 황룡부(黃龍府)로 돌진하리라 맹세했다. 당시 백성들은 스스로 무기와 식량 따위를 챙겨 “산을 뒤흔들기는 쉬워도 악가군을 뒤흔들기는 어렵다”며 너나없이 악가군을 따라 참전했다.
진회는 금나라 군대가 무너지면 지금까지 다져온 자신의 권력 기반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두려웠다. 또한 금나라에 잡혀간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되돌아오는 날에는 천신만고 끝에 얻어놓은 황제 고종(高宗)의 총애가 달아날까 두려웠으며, 악비가 자신의 명성과 지위를 뛰어넘을까 겁이 났다. 진회는 고종을 종용했다. 비상사태 때나 내리는 12도(道) 금패(金牌)까지 발동해 악비의 회군을 재촉했다. 결국 송나라가 10년 공들여 쌓은 탑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말았다.
악비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린 채 역사와 민중에 영원히 사죄하는 간신 진회 부부상.
악가군이 회군한다는 소식은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가듯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이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뛰쳐나와 악가군의 회군을 막아섰다. 백성들은 악비의 말을 붙들고 실성한 목소리로 통곡했다.
“우리가 식량을 나르며 악가군을 맞은 것을 금나라 도적들이 낱낱이 알고 있습니다. 한데 지금 상공께서 떠나시면 우리는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악비는 눈물만 흘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악비는 회군하자마자 병권을 박탈당했다. 진회는 이 정도에 만족하지 않았다. 또다시 이런 위기가 닥칠까봐 악비에게 이른바 ‘막수유(莫須有)’, 즉 ‘혹 있을지도 모르는’ (날조한) 모반죄를 씌워 처형했다. 이때 악비의 나이 서른아홉이었다.
역사는 곧 ‘뒤끝’
혹자는 악비의 ‘충(忠)’에 이의를 제기하며, 그의 충성은 어리석은 충성이었다고 한다. 그가 송나라 군대의 전력도 생각하지 않고 강경 대응만을 고집하는 바람에 송나라 백성이 크게 희생됐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민중은 여전히 끊임없이 악비를 칭송하며 일부 사학자의 말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악비의 정충보국(精忠報國)한 ‘충’이 그저 조정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조국과 민중에 대한 충성이었기 때문이다.
진회는 송 고종의 강화 노선에 충실했다. 그런데 왜 진회에 대해서는 죽어 썩어서도 세상의 비난이 그치지 않았을까. 그 까닭은 그가 수많은 민중의 생활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종이라는 군주 개인의 이익을 지키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와 민중은 영원히, 그리고 단호하게 그를 천고의 간신이자 만세의 죄인으로 단정하는 것이다.
풍파정에서 악비는 고종과 진회의 교활한 웃음을 뒤로한 채 고독하게 죽어갔다. 하지만 역사는 그의 죽음을 또렷이 기억했다가 단호한 심판을 내렸다. 역사는 그 자체로 ‘뒤끝’이다. 충신 악비는 처형당하고 간신 진회는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역사는 진회의 죄상을 잊지 않고 결국 그 부부의 상을 만들어 악비의 무덤 앞에다 무릎을 꿇려 놓았다. 영원히 그 자리에서 악비에게 사죄하고 역사에 사죄하고 민중에게 사죄하라는 엄벌인 셈이다. 역사의 평가에 ‘공소시효’는 없다.
김영수 | 사학자, 중국 史記 전문가
<이 기사는 신동아|12월호 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