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석주 부산대 응급의학과 교수
재해 때에는 여러 조직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세월호 대책에는 해경, 해양수산부, 소방, 보건복지부, 지방자치단체 등 다양한 조직이 관계했다. 그런데 모 부처의 매뉴얼에는 큰 사고가 나면 다른 이슈를 제기해 여론을 덮어버리라는 항목이 있었다. 그런 매뉴얼은 공개되지 않을 것이다.
매뉴얼은 상호 간 약속이다. 상대의 매뉴얼을 모르면 상대 행동을 예측할 수 없다. 사전 약속도 없이 무술영화를 촬영한다고 하자. 손발이 안 맞고 부상이 속출하는 것은 당연하다. 훈련이 부족하다고들 한다. 그런데 매년 훈련을 해왔는데도 숭례문이 불에 타버렸다. 의미를 모르는 채 흉내를 냈기 때문이다. 기왓장을 벗길 것인지 고민하지 않고 훈련 매뉴얼을 작성했다. 훈련을 위한 훈련을 한 것이다. 선진국에서는 큰 사고가 나면 수많은 조직이 백서를 쓰고 공개한다. 국내에서는 백서를 쓰지 않거나, 자화자찬하거나, 책자로 배포한다. 몇 년이 지나면 어느 캐비닛 속에 들어 있는지도 알 수 없다. 더구나 우리 공무원들은 순환 보직으로 일한다.
재해 대비는 최후의 시험인 대학수학능력시험에 대비해 나가는 과정과 비슷하다. 매뉴얼은 예상 문제이다. 훈련은 예상 문제를 외우는 과정이다. 백서는 틀린 이유를 분석하고 예상 문제를 재점검하는 오답노트이다. 매뉴얼과 훈련, 백서를 여러 번 순환시켜야 사회 전체가 발전해 나가게 된다.
우리는 이제 재해 대비에 매뉴얼과 훈련, 백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제대로 만들고 사용하는 방법을 모른다. 매뉴얼과 백서를 누구나 쉽게 볼 수 있게 인터넷에 공개해야 한다. 법이라도 만들었으면 좋겠다.
조석주 부산대 응급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