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前대통령 서거]돈보다 사람 욕심 많았던 ‘정치 9단’
2002년 상도동 찾아간 대선후보 노무현 2002년 4월 30일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대통령 후보(왼쪽)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울 상도동 자택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동아일보DB
#장면2. 2011년 7월 6일. 당시 한나라당 홍준표 대표(현 경남지사)는 취임 직후 YS에게 가장 먼저 가 넙죽 큰절부터 올렸다. 그러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큰절(하는 사람)은 밖에서는 각하뿐”이라고 말했다. ‘모래시계 검사’로 불렸던 홍 지사는 1996년 15대 총선에서 공천을 받아 정계에 입문한 ‘YS 키즈’다.
이처럼 YS는 1987년 민주항쟁 이후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거물급 정치인들을 대거 등용했다. 동시에 수많은 인재들이 활약할 수 있는 무대를 열어줬다. ‘정치 9단’ YS의 용인술이 주목받는 이유다.
YS는 돈보다 사람 욕심이 많았다. “머리는 빌리면 된다”는 지론으로 필요한 사람은 반드시 데려다 써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광폭 인사’가 가능했던 배경이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 첫 청와대 참모와 내각 인선을 발표했을 때 정치권은 충격에 휩싸였다. 김정남 대통령교육문화사회수석비서관을 비롯해 통일부총리에 한완상 서울대 교수, 교육부 장관에 오병문 전 전남대 총장 등 재야 고수들이 대거 발탁됐기 때문. 김 수석은 김지하 시인의 구명운동을 배후에서 주도하며 ‘민주화 운동의 비밀병기’라고 불렸던 인물이다.
첫 조각 당시 실무진이 추천한 리스트의 절반은 YS가 ‘모르는 이름’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YS는 이를 받아들였다. YS 정부의 개혁 청사진을 입안했던 전병민 씨는 24일 “대한민국에서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인 ‘지인지감(知人之鑑)’이 가장 뛰어난 지도자였다”고 회상했다.
사람 구하는 데 경계선은 없었다. YS 주변에선 고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현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화제가 되고 있다. 미국의 에드워드 케네디 전 상원의원이 김 전 고문의 사면복권을 요청하자 YS는 이를 수용했다. 한 측근은 “YS는 김 전 고문에게 축하할 일이 있으면 직접 전화를 걸 정도로 좋아했다”고 전했다. 이런 분위기를 간파한 YS 측근들은 김 전 고문 영입 작전에 나섰으나 막판에 무산됐다는 후문이다.
1987년 ‘박종철 사건’때 YS와 김무성 1987년 3월 1일 서울 종로구 기독교회관 앞에서 김영삼(YS) 전 대통령이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진상 규명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YS 뒤쪽 왼편으로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점선 안)가 보인다. 동아일보DB
19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YS는 영원한 맞수였던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인재 수혈 경쟁을 벌였다. YS는 회고록에서 “나는 공천의 전 과정을 하나하나 꼼꼼히 챙겼다. 당에서 추천한 단일후보까지 바꿀 정도로 직접 최종 인선했다”고 적었다.
여권에선 ‘YS의 정치적 아들’을 자처하는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검사 출신인 홍 경남지사, 안상수 경남 창원시장, 의사 출신인 정의화 국회의장이 이때 국회에 입성했다. YS는 당시 공천에 만족감을 나타내며 퇴임 후 회고록에 그 명단을 전부 싣기도 했다. 새정치연합 손학규 전 상임고문 등이 대표적인 야권의 YS 키즈다.
YS는 인사에서 철저한 승부사 기질을 보였다. 1993년 12월 국무총리로 기용한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를 4개월 만에 경질했다가 2년 뒤 15대 총선의 지휘봉을 맡겼다. 이 전 총재의 ‘대쪽 이미지’가 총선 승리에 절실했기 때문. 공보수석을 지낸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24일 라디오에서 “문제가 생겨 여론이 좋지 않으면 해결(경질)하는 것도 번개 같았다”고 말했다. YS는 ‘인사가 만사(萬事)’임을 몸소 보여줬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