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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R 경영의 지혜]조선시대 첩은 청탁창구… 뇌물이 지배한 밤의 역사

입력 | 2015-11-26 03:00:00


뇌물은 역사를 바꾸었다. 200년간 전쟁을 지속한 십자군 원정도 한 번의 뇌물로 극적 반전을 이뤘다. 1차 원정 때 십자군은 난공불락의 안티오크를 만났다. 이 성을 넘어야 예루살렘에 입성할 수 있었다. 식량도 떨어지고, 전염병까지 돌아 많은 군사들이 죽었다.

그때 십자군 원정대 대장이었던 보에몽은 성을 지키던 수비대장을 매수해 성문을 열게 했고, 십자군은 안티오크를 점령해 예루살렘 공국을 세울 수 있었다. 수비대장이 뇌물의 유혹을 조금만 참았더라면 더 이상의 십자군 원정은 없었을 것이다.

뇌물을 다룬 책, ‘뇌물의 역사’(임용한 김인호 노혜경·이야기가 있는 집·2015년)에는 이처럼 세상을 은밀히 지배해 온 뇌물의 오랜 역사가 낱낱이 소개되고 있다.

첩과 뇌물의 관계도 흥미롭다. 조선시대 첩은 중요한 뇌물 창구 역할을 했다. 뇌물을 줄 때 두려운 것은 배달 사고와 중간 착복이다. 제일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가족이지만 자기 집에서 불법 거래를 하다 보면 걸리기 쉽다. 첩은 수완, 경험, 미모, 남자를 다루는 솜씨가 있었다.

조선시대 관리들이 지방으로 발령을 받으면 가족을 두고 혼자 가야 했다. 정부에서 가족의 체류비까지 댈 수는 없다는 명분이지만 실제 이유는 뇌물 때문이었다. 청탁자들은 주로 가족을 노리기 때문에 아예 원천 봉쇄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관리들은 예외 없이 현지 사람을 첩으로 두고 청탁 창구로 사용했다. 뇌물에 대한 비난마저 국가 대신 첩에게 갔다.

뇌물의 역사에는 뇌물을 막으려는 노력의 역사도 등장한다. 그동안 수많은 방법이 동원됐다. 청나라 옹정제는 양렴은(養廉銀)이란 특별수당제도를 만들었다. ‘염치를 기르는 돈’이란 뜻이다. 봉급 외에 관리의 행실에 따라 지급하는 수당 내지는 보상금이다. 청렴하고 근면하게 살면 보수의 몇 배에 해당하는 금액을 지급했다.

뇌물이 사라지긴 힘들 것이다. 하지만 최소화할 수는 있다. 하나는 사람들에게 뇌물이 위험하고 발각되는 순간 패가망신할 수 있다는 마인드를 심어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부패를 근절할 수 있는 기관과 제도를 만드는 것이다.

한근태 한스컨설팅 대표 kthan@assist.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