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이승재 기자의 무비홀릭]철없는 아이들

입력 | 2015-11-26 03:00:00

영화 ‘이스케이프’의 한 장면.


20일 서아프리카 말리의 수도에서 이슬람 무장단체에 의해 일어난 테러 사건을 전해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현실에서 일어난 이 사건이 얼마 전 내가 본 영화 속 장면과 너무도 흡사했기 때문이다.

이달 초 국내 개봉했다가 바로 망한 미국 영화 ‘이스케이프’는 해외 파견근무를 가게 되어 가족과 함께 동남아의 한 이름 모를 나라에 당도하는 미국 남자 ‘잭’(오언 윌슨)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잭은 카디프라는 글로벌 기업의 엔지니어인데, 어느 날 잭이 가족과 머무는 고급 호텔에 반군이 들이닥친다. 호텔 방문을 하나하나 열면서 서양인만 골라 죽이는 반군의 최종 목표는 잭. 잭이 속한 글로벌 기업이 이 나라의 수도 사업을 장악하자 “생명과 다름없는 식수마저 빼앗는 미국 기업에 봉사하는 놈들은 다 죽여 버려야 한다”는 반군이 잭과 아내, 두 딸을 처형하기 위해 달걀귀신처럼 쫓아오는 것이다.

영화 속 바로 이 장면은 말리에서 벌어진 테러 사건과 기묘하게 겹쳐진다. 말리에서도 서양인들이 주로 머무는 5성급 호텔을 습격한 테러범들이 ‘프랑스 국적자’를 최우선적으로 처단하기 위해 호텔 구석구석을 수색하면서 에어프랑스 항공사 직원들을 찾아다녔다는 것 아닌가. 생각만 해도 소름 돋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만큼 영화는 그 어떤 현실보다 더욱 현실적인 것이다, 라고 내가 쓸 것이라고 예상하겠지만 그렇지 않아 죄송하다. 이 영화는 죽을 똥을 싸면서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국경을 넘어 베트남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는 주인공의 고군분투기를 통해 가족의 소중함을 부각시키려 하지만, 매우 놀랍게도 관람을 마치고 퍼뜩 든 생각은 ‘자식은 일생의 짐’ 혹은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속담이었다.

이 영화를 본 뒤 멀티플렉스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던 나는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두 여성이 나누는 다음과 같은 고급스러운 대화를 듣게 되었다. “씨×, 졸× 짜증 나. 애××들 때문에 스트레스 졸× 받아 토하는 줄 알았어.” “저래서 사람들이 애를 안 낳는 거야.” 왜냐?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의 두 딸이 시쳇말로 온갖 진상을 떨어대는 탓에 관객의 짜증이 극에 달하게 되기 때문이다. 호텔 곳곳을 이 잡듯 뒤지는 테러리스트들 몰래 가족이 도망칠라치면 막내딸은 “내 인형 떨어졌어. 어떡해. 주워줘. 난 인형 없인 안 갈 테야”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가족의 위치는 산뜻하게 발각된다. 밉상 막내딸은 가족이 천신만고 끝에 은신처를 찾아 숨죽이고 있을라치면 “나 오줌 마려” 하고 발발 떨면서 또 테러범들에게 ‘우리 여기 있어요’ 하고 손짓하는 것이다. 심지어 ‘너라도 살아라’ 하는 절실한 아버지의 심정으로 아버지가 안전한 옆 건물로 딸들을 던지는 긴장감 폭발의 순간, 큰딸은 “싫어” 하면서 아버지 목을 구렁이처럼 칭칭 감고 늘어지는 바람에 아버지는 중심을 잃고 건물 옥상에서 떨어질 뻔하는 아찔한 순간을 맞이한다.

천사 같은 외모로 미운 짓만 골라서 하는 딸들의 모습이 영화가 끝날 때까지 종류별로 반복되는데, 영화니까 그렇지 만약 진짜 테러 상황에서 애들이 이런 짓을 했다면 주인공 가족은 아마 500번은 죽고도 남았을 것이다. 주인공이 이스케이프(탈출)해야 하는 대상은 테러범이 아니라 알고 보니 제 자식들이었던 거다. 사랑스러운 딸들을 이토록 엄청난 리스크 요소로 그려내는 이 영화의 감독이 진정 던지고자 했던 메시지는 ‘가족애’가 아니라 ‘산아제한’이 아니었을까 하는 미친 상상마저 하게 된다.

생각해 보면, ‘철없는 아이들’은 많은 영화의 스토리가 작동하게 만드는 엔진이다. 한국에선 대부분 망하지만 미국에선 청소년들이 목숨 걸고 본다는 영화 ‘헝거게임’ 시리즈의 여주인공 ‘캣니스’(제니퍼 로런스)도 동료를 제치고 살아남아야 하는 경쟁을 거부한 채 이런 적자생존의 룰을 만든 억압적 어른사회를 향해 화살을 날리며 세계 전복을 외치지 않는가 말이다. 수능에서 1점이라도 더 따는 게 인생의 ‘비전’이 되어버린 한국의 중고생들로선 기성세대에 반항 따위나 하면서 피 같은 시간을 ‘허비’하는 영화 속 미국 청년들의 모습에 공감하기란 애당초 불가능하겠지만, 지난주 국내 개봉된 이 시리즈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편인 ‘헝거게임: 더 파이널’의 라스트 신만큼은 매우 유의미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라스트 신. 음모가 횡행하는 어른들의 세계를 무너뜨린 캣니스는 고향으로 돌아와 남자친구와 살림을 차린다. 그리고 그녀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며 영혼의 안식을 비로소 찾는다. 혁명의 상징이었던 그녀도 결국엔 어른이 되고 기성세대가 된다는 얘기다. 아마도 헝거게임의 다음 시리즈가 ‘헝거게임: 더 데이 애프터’란 제목으로 10년 뒤 나온다면 자신이 그토록 미워하는 독재자가 스스로 되어버린 캣니스에 맞서는 그녀의 딸 ‘캣너스’의 이야기가 아닐까?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