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4년 4월 22일 전 전 대통령이 퇴임 후 처음으로 모교인 대구공고를 방문해 까마득한 후배들 앞에서 강연했다. 열렬한 환호에 고무됐던 걸까. 그는 공개석상인데도 반쯤 말을 놓은 채 학창 시절 “심심하면 남의 사과를 몰래 따먹은 일”부터 시작해서 별별 얘기를 다 했다. “백담사로 ‘땜장이’(공고 출신에 빗대) 동문들이 등산객이나 신도를 가장해 몰래 찾아왔다”는 일화를 소개하며 “술과 고기를 절 부근에서 먹으니 정말 살 것 같더라”라고도 했다. 일부 청중은 “대통령을 지낸 분이 품위 없이…” 했지만 학생들은 거의 까무러쳤다.
▷전 전 대통령은 26일 김영삼 전 대통령 빈소를 찾아 조문한 뒤 고인에 대한 평가나 화해 여부엔 함구한 채 엉뚱하게 자신의 금주, 금연 얘기만 잔뜩 하고 돌아갔다. “난 담배는 옛날부터 못 묵었고요, 술은 군대생활 할 때 마이 묵고 근데 술도 맛을 몰라요.” “(군 시절) 요놈들이 내가 (담배를) 안 피니까 자기들이 핀다.… 내가 대여섯 살 많은데.” 곤란한 질문에 동문서답하거나 딴 얘기로 눙치는 것도 화제를 주도할 수 있기에 가능할 터이다. 이럴 땐 전직 대통령이라도 갑은 갑이다.
한기흥 논설위원 eligiu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