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교 50년, 교류 2000년/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 [2부 조선통신사의 길]<7>조선통신사 피살사건
일본 오사카 시내 지쿠린지 본당 뒤편에 서 있는 김한중의 묘비(위 사진). 1764년 조선통신사 일행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던 김한중은 오사카에 도착하기 전 풍토병에 걸려 지쿠린지에서 숨을 거뒀다. 그가 사망하기 직전 애절한 심정을 표현한 시는 일본인들이 추모비(아래 사진)에 새겨 오사카 마쓰시마 공원 한가운데에 보존하고 있다. 오사카=정위용 기자 viyonz@donga.com
1층 사무실 초인종을 눌렀더니 나이 든 여성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자로 쓰인 기자 명함을 초인종 앞 카메라에 갖다 댔다. 한참 뒤에 일흔이 넘어 보이는 할머니가 나왔다. 절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 한국 사찰에서 흔히 불리는 ‘보살’ 같았다.
영어로 이름을 밝혔더니 두 손으로 합장하며 머리를 숙였다. 곧이어 “김한중?”이라고 물었더니 “오오”라고 응답하며 급히 신발을 챙겨 신고 절 마당으로 나왔다. 할머니가 안내한 본당 뒤편으로 가니 김한중의 묘비가 서 있었다. 1764년 4월 11번째 통신사 일행들 중 춤추는 소동(小童)으로 뽑혔다가 대마도(쓰시마 섬)에서 오사카로 오는 도중 풍토병에 걸려 그만 이곳에서 숨을 거둔 고인의 묘비였다. 높이 70cm 비석이 외로이 서 있었다.
477명의 통신사 일원이었던 김한중은 당시 22세였다. 험한 뱃길을 무사히 건너 일본 본토에 도착한 뒤 육로로 오사카로 가던 도중에 그만 병에 걸린다. 오사카에 도착했을 때에는 위독한 상태였다. 조선통신사 대표(정사)로 고구마를 들여온 인물로 알려진 조엄을 비롯한 직속 상관들은 그를 서둘러 이곳 지쿠린지로 옮겨 치료를 맡긴다. 하지만 병세는 갈수록 악화돼 결국 숨을 거두고 만다.
김한중이 눈을 감기 직전 조선에 남겨두고 떠난 두 아이를 보고 싶다고 하자 지쿠린지 주지가 이웃 일본 아이 둘을 데려와 보여줬다는 일화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죽음의 문턱에서 김한중은 지쿠린지에 이런 시를 남겼다. 낯선 땅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할 운명에 대한 안타까움이 절절히 배어 있다.
‘今春倭國客 去年朝中人 浮世何會定 可歸古池春(올봄에는 일본의 손님이지만, 지난해는 조선에 있던 사람이었네. 뜬구름 같은 세상에 어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할 것인가, 옛 땅의 봄을 다시 느낄 수 있을 것인가).’
그가 숨지자 당시 지쿠린지 주지는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100만 번 읊었다고 한다.
조선통신사 일행이던 최천종이 피살된 니시혼간지 쓰무라 별원 터에는 현대식 불교 건물이 들어서 있다. 통신사 일행 중 고위급 인사들이 오사카에 도착한 뒤 숙소로 이용했던 곳이다. 오사카=정위용 기자 viyonz@donga.com
이런저런 상념에서 깨어 이번에는 할머니에게 “최천종 비석은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없다”는 뜻으로 손을 흔들며 본당을 가리키더니 절하는 몸짓을 했다. 위패만 모셔두고 제사를 지낸다는 뜻이었다.
최천종 역시 김한중과 같은 일행으로 11회 통신사 일행이 되어 일본에 왔다가 불행하게 삶을 마감한 통신사이다. 통역과 사무를 도왔던 ‘도훈도(都訓導)’ 자격으로 왔던 그는 일본인과의 사소한 말싸움 끝에 일본인이 휘두른 칼에 찔려 숨졌다.
오사카에 온 통신사들은 정사 등 고위층은 오사카 시내 니시혼간지 쓰무라 별원(西本願寺 津村別院)에서 잠을 자고 하위직 100여 명은 배에서 묵었다. 니시혼간지에 묵던 최천종은 1764년 4월 7일 거울을 잃어버린다. 대마도에서 함께 온 일본인 스즈키 덴조에게 찾아내라고 하다가 말다툼을 벌인다. 분을 삭이지 못한 스즈키는 밤에 최천종이 자는 방에 침입해 그를 칼로 찔러 죽이고 달아나 버린다.
니시혼간지 쓰무라 별원은 지하철 혼마치 역을 빠져나오니 바로 보였다. 안으로 들어서니 건물 규모가 커서 놀랐다. 휴대전화 화면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다. 통신사들이 묵었을 때에는 규모가 더 커서 방만 1000칸이 넘었고 한꺼번에 500명을 수용할 만큼 으리으리했다고 한다. 사무실에 들어서 “조선통신사들이 묵었던 숙소를 보여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검은색 승복을 입은 사무장이 다가와 “지금은 없다. 이 건물은 평상시에는 주로 회의나 전시회 임대용으로 쓰인다”며 고개를 저었다. 다만 팸플릿에 적힌 ‘1655년 조선 사절단의 여관으로 조선과의 외교에서 한몫을 했다’는 문구만 당시 역사를 증언하고 있었다.
현재 건물은 1945년 오사카가 폭격을 맞았을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964년 다시 지은 것이다. ‘별원’이라는 명칭은 절의 중심이 교토로 옮긴 뒤에 생겼다고 한다. 사무장의 말대로 옛날 숙소가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최천종 피살사건은 당연히 한일 간 외교 문제로 비화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인들은 군사 2000여 명을 풀어 사건 발생 11일 만인 4월 18일 범인을 체포하고 같은 해 5월 2일 사형에 처한다. 그때까지 통신사들도 일정을 중단하고 일본의 대응을 지켜보았다. 최천종의 시신은 지쿠린지에서 조선식으로 장례를 치른 뒤 조선으로 옮겨진다. 위패는 이 절에서 모셔왔다.
일본 사회에서는 ‘최초의 통신사 살인사건’이라는 희귀성 때문에 최천종 피살을 그린 문학과 연극이 상당 기간 이어졌다고 한다. 관람객이 인산인해를 이룬 가부키도 공연됐다가 중단되기도 했다. 또 다른 외교 문제로 비화할 것을 우려한 막부의 압력 때문에 중단됐다.
조선통신사가 오사카의 요도가와 강을 지나는 모습을 그린 그림. 통신사들을 안내하기 위해 노를 젓거나 배에서 시중드는 모습이 꾸밈없이 그려져 있다. 오사카=정위용 기자 viyonz@donga.com
한 번에 수백 명이 이동하는 통신사들의 일정이다 보니 이처럼 예기치 않은 불의의 사고들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일본인들은 짧은 기간에 손님을 대접하고 우정을 나누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특히 오사카 주민들은 통신사들에게 원숭이 칼춤과 고래잡이 현장을 보여주며 피로를 잊게 배려했다. 이에 통신사들은 일본인들에게 말 위에서 재주를 부리는 마상재와 조선의 춤을 답례로 선보였다. 조선 통신사들은 귀한 일본 준마에게 금색 안장을 얹고 덧신을 신긴 뒤 난바교와 니시혼간지까지 이어진 오사카 거리를 행진했고, 일본 관리들은 조선 관리들에게 당시 비밀에 둘러싸여 있던 왕궁까지 개방했다.
오사카 시내 요도가와 강변은 대마도를 떠난 통신사들의 배가 도착하면 정박하던 곳이었다. 기자가 강변을 찾은 날에는 오사카 시청 환경국이 세워놓은 바지선 몇 척이 밧줄에 묶여 있었다. 강 오염물을 치우고 하천을 정비하기 위한 선박으로 보였다. 조선통신사가 오갈 때 일본인들은 강 양쪽에 늘어서 행렬을 지켜봤을 것이라는 상상이 들었다. 오로지 통신사를 보려는 목적으로 사흘 동안 걸어서 이 강변에 도착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오사카 남쪽 돈다바야 시의 미구쿠루미타마(美具久留御魂) 신사에 보관돼 있는 통신사 그림은 당시 오사카 주민들의 이런 환대를 묘사한 것이다. 그림을 보기 위해 신사에 들렀다. 미나미 미쓰히로(南光弘) 동오사카 문화재학회 회장이 기자와 동행했다. 오사카 시내에서 승용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진입해 40분쯤 지나 신사에 도착해서 사무국 문을 두드렸더니 아오다니 마사요시(靑谷正佳) 궁사가 응접실로 안내했다. 그는 “젊었을 때 화학 플랜트 엔지니어로 일했는데 울산 산업단지에서도 일해 본 적이 있어 한국과 인연이 깊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본전에 붙어 있는 방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이 방에서 벽에 걸려 있는 그림 몇 개가 보였다. 조선통신사가 배를 타고 지나가는 모습을 그린 그림은 출입문 쪽 벽 상단에 걸려 있었다. 아오다니 궁사는 “1795년 조선통신사 일행이 요도가와 강을 지나갈 때 신사 주변 마을 사람 10명이 그 장면을 보기 위해 사흘을 걸어 오사카에 도착했다”며 그림을 그린 사람들이 평민들이라고 강조했다.
그림에는 정사 부사 종사관 등 3사를 뜻하는 깃발이 배 위에 그려져 있고, 웃통을 벗은 일본인들이 노를 젓거나 배에서 시중을 드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미나미 회장은 “당시의 평민들이 본 광경을 그대로 그린 것으로, 원근법도 쓰지 않은 소박한 그림”이라고 소개했다. 아오다니 궁사는 “그림을 그린 사람들은 성(姓)도 따로 갖지 않았던 평민들이었는데 놀라운 광경을 그린 그림을 진귀한 물건이라고 여겨 신사에 봉납했다”고 전했다.
일본 막부 쇼군(將軍)들은 통신사 도착 전부터 강 밑바닥의 흙을 퍼내 배가 지나도록 준비하는 등 대규모 토목 공사를 벌이고 인력을 동원했다. 조선통신사가 배를 타고 지나가는 수로 주변의 섬을 깎거나 사들였다는 기록도 나온다. 일행들의 잠자리로 당시 오사카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건물인 니시혼간지를 내준 것은 물론 화재에 대비해 예비 숙소까지 따로 마련해 놓을 정도로 세심했다. 숙소에서는 조선인 관직에 따라 색깔과 재질이 다른 이부자리를 준비했는데 일부 조선인은 소매가 달린 이불을 받고 “수의(죽은 사람에게 입히는 옷)와 같다”며 일본인에게 되돌려줬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