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훈 수석논설위원
YS 평가 정확히 해야
이 회장은 이날 황병태 주중 대사도 만나 “김영삼 정부의 개혁이 지향하는 바가 뭐냐” “기업의 국제경쟁력을 높여주지 않고 무슨 세계화냐”라는 비판을 거듭했다. 그때 청와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이원종 정무수석의 화난 목소리가 새나오자 이 회장은 움찔했다.
지금 새겨 봐도 백번 맞는 말이다. 그러나 YS는 노발대발했다. YS는 집권 후 기업인 중 최초로 이 회장과 독대한 바 있다. YS의 화가 풀릴 때까지 삼성은 4개월여 신규사업이 좌절되거나 대통령 방미 기업인 수행에서 배제되는 뼈아픈 대가를 치렀다.
YS는 질풍노도처럼 개혁을 단행했지만 이건희의 평가가 후하지 않았던 이유가 있다. 금융실명제를 포함해 정치성이 짙은 쪽에만 개혁의 방점이 찍혀 있다고 본 것이다. “삼성의 반도체 연구개발(R&D) 투자가 얼마냐”고 묻고 규제를 푸는 장쩌민의 실용적 리더십에 놀랐고 중국의 도약을 예견했다. 그런 심경을 거칠게 표현한 셈이다.
YS는 그해 8월 15일 옛 중앙청(조선총독부) 건물의 돔을 허물고 12월에는 전두환과 노태우를 구속기소했다. 12·12와 5·18로 이어진 군사반란에 대한 책임 규명과 전직 대통령들의 부정 축재까지 파헤쳤다. 그러나 그때까지였다. 경제에 적신호가 켜졌는데도 “펀더멘털은 튼튼하다”는 관료들의 말만 믿었고 결국 외환위기가 닥쳤다. ‘정치 9단’의 한계였다.
주먹세계에서 큰 주먹이 사라지면 동네 주먹들이 설친다. 양김(兩金) 같은 카리스마형 지도자가 사라진 지금 정치권이 꼭 그런 형국이다. 국가적 과제인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을 야당이 막판까지 끌어 30일 통과돼도 연내 발효가 빠듯하다. 야당이 예산 떡고물을 챙길 속셈으로 그런다는 소문도 나돈다.
도토리 키 재는 정치권
YS의 5일장이 끝났으니 이제 여야 할 것 없이 그동안 미뤄뒀던 계파싸움을 재개할 것이다. 지금 의식이 없는 상태인 이 회장이 깨어나면 우리 정치를 어떻게 평가할까. 20년 전, 정치에 4류 점수를 매긴 것을 감안하면 지금 정치는 5류 이하라고 혹평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