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 포니
나도 최근 이곳에 다녀왔다. 내가 받은 첫인상 역시 다른 사람들과 비슷했다. (‘와! 진짜 크다’ ‘책 진짜 많다’ 등….) 그러나 곧 신기한 느낌은 없어졌고, 이 서가의 두 가지 큰 문제점을 찾았다. 첫 번째는 책들이 전혀 정리되지 않고 아예 ‘랜덤’으로 꽂혀 있었다는 점이다. 한국어로 된 국제법 교과서는 위스키의 맛에 대한 내용을 담은 영문 안내서와 독일어로 쓰인 문학평론 책 옆에 있었다. 나는 읽고 싶은 책을 찾을 수 없었다. 두 번째는 손이 닿을 수 있는 서가의 책만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은 책꽂이 위치가 너무 높아 손이 닿기는커녕 볼 수도 없었다. 심지어 사다리도 없었다.
겉으로 보기엔 매우 인상적이지만 기능적인 구조는 아니었던 것이다. 30분 정도 서가를 구경하다가 마침내 관심 있는 시집을 찾아 자리에 앉았다. 내 주변으로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면서 서가에 꽂힌 책의 제목을 읽으며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사실 나는 책을 읽는 척하며 이곳 건축 디자이너를 조용히 비판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새로운 생각이 들었다. ‘지혜의 숲.’ 이곳의 이름을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건물은 건축가의 과도한 의욕이 부른 흠이 아니라 어쩌면 압도적인 탑 같은 이 서가에 상징적인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또 하나는 책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지혜뿐 아니라 건물의 구조를 통해서도 배울 수 있는 점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손이 닿을 수 없는 서가엔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해 보았다. 서가의 닿을 수 없는 책처럼 머리에 닿을 수 없는 지혜도 많다. 지혜를 얻는 첫걸음은 우리 스스로가 알 수 없는 것을 인정하고, 아는 것이라도 의문을 가지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선 스마트폰을 통해 세상의 모든 지식을 빠르게 알 수 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옛 선조들에 비해 본인들이 더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 지식은 진짜 얻은 지식인가? 더 중요한 것은, 이 지식을 통해 우리는 더 행복하거나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책이나 인터넷을 통해 얻은 지식은 경험을 통해 얻은 지혜와는 또 다른 가치가 있다. 그러나 ‘지혜의 숲’에서 내가 얻은 겸손과 경외감은 서가를 직접 돌아보며 얻은 경험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또 30분 동안 여러 책을 구경하다 기대하지 않았던 시집을 찾았는데, 아주 좋았다. 우리 인생에서도 기대하지 않은 것을 얻을 때가 원하는 것을 바로 얻을 때보다 더 보람이 클 것이다.
지식과 지혜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모두에게 중요하다. 그러나 한국의 교육시스템은 아직도 기계적인 학습 방법이 많다. 표준화된 시험에 의지하지 않도록 학생들도 이 지식과 지혜의 관계를 차분히 생각해 봤으면 한다.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 학생들은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다양한 관점을 복합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꼭 가져야 한다. 교육학자들은 학생들에게 호기심과 더불어 모든 일에 의구심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을 제1의 책임으로 여겨야 한다. 특히 사회, 인간관계, 그리고 역사 같은 복잡한 주제를 하나의 관점으로만 배우게 되면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며 지혜를 얻을 수 있는 능력은 사라질 것이다.
※ 벤 포니 씨(28)는 2009년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한국에 왔으며 현재 서울대 국제대학원에서 동아시아 국제관계학을 공부하고있다. 6·25전쟁 당시 흥남철수작전을 이끌어낸 고 에드워드 포니 대령의 증손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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