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대수가 말하는 음악인생
지난달 24일 오후. 미국 뉴욕 라디오시티뮤직홀 공연을 준비 중인 싱어송라이터 한대수(왼쪽)가 서울 신촌의 ‘고시원’ 침대에 부인 옥사나와 함께 앉았다. 둘은 마주보며 끊임없이 웃었다. 웃는 데 이유는 필요 없었다. 그 순간엔 누구도 고독하지 않았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서울 지하철 2호선 이대역과 신촌역 사이에 있는 극장에서 신촌역 방면으로 걸었다. 그는 남서쪽 하늘을 올려다봤다. 비가 곧 내릴 듯했다. 회색 빌딩 숲 위를 회색 구름 떼가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저 위에 계신 분이 참 야속해요. 나이 들면 가만 놔두지를 않아. 크하하하.” 연말에 한국에서 마지막 공연을 열고 미국으로 영영 떠난다는 얘기가 근래 떠돌았는데 그는 낭설이라고 했다.
근처 오피스텔 건물로 기자를 안내한다. 건물에 포크 록 가수 한대수(67)의 집이 있다. 25m²쯤 되는 이곳을 그는 ‘고시원’이라 불렀다. 침대 맞은편 의자에 툭 걸터앉아 한대수는 낙타가 그려진 노란 담뱃갑부터 들었다.
그날 ‘고시원’엔 옥사나(45)도 있었다. 1992년 한대수와 결혼한 러시아인 여성 옥사나 알페로바 또는 한옥사나. 귀가 큰 러시아식 털모자를 쓴 옥사나의 미소가 엷었다. ‘욕망’(2006년) 표지에 한대수는 옥사나의 누드 사진을 실었다. ‘상처’(2004년)는 그가 옥사나에게서 받은 상처를 표현한 앨범이라고 했다. 많이 호전됐지만 여전히 알코올 의존증과 투병 중인 옥사나는 한대수에게 지독한 사랑이다.
한대수는 포크 가수가 아니다. 록부터 아방가르드 재즈까지 드넓은 황야를 유랑했다. 왼쪽 위부터 1974년 1집 ‘멀고 먼-길’, 1975년 2집 ‘고무신’, 1989년 3집 ‘무한대’, 1990년 4집 ‘기억상실’, 1992년 5집 ‘천사들의 담화’, 1999년 6집 ‘1997 후쿠오카 라이브’, 1999년 7집 ‘이성의 시대, 반역의 시대’, 2000년 8집 ‘Eternal Sorrow’, 2002년 9집 ‘고민’, 2004년 10집 ‘상처’, 2006년 11집 ‘욕망’.
한대수는 설레는 맘으로 크리스마스를 기다린다. 최근엔 ‘Silent Night’ ‘Christmas Song’을 혼자 불러 녹음했다. “내년엔 크리스마스 앨범을 내보고 싶어서요. 내 이런 목소리로 캐럴 부르면 얼마나 재미나겠어. 크하하하.”
내년 하반기 미국 뉴욕 ‘라디오시티뮤직홀’(6000석)의 대관 신청 결과도 기다린다. 성사되면 한국인 최초다. 록펠러센터 내에 위치한 이 유서 깊은 공연장에 그가 걸 콘서트 제목은 ‘칭기즈칸의 귀환’. 1974년 ‘물 좀 주소’ ‘행복의 나라’의 금지곡 판정 뒤 뉴욕에 건너간 그가 음악적 갈증에 결성한 밴드가 ‘칭기즈칸’이다. “그 멤버는 아니지만 다시 한번 뉴욕에서 사자후를 토하고 싶어서요.”
7년간 진행한 라디오 프로그램이 최근 종방되면서 조금 한가해지고 조금 가난해졌다면서 한대수는 특유의 너털웃음을 간헐천처럼 뿜었다.
한대수에게 ‘뉴욕-서울’은 애욕의 선분이다. “지금껏 두 도시를 50번쯤 오간 것 같다”고 말했다. 부친은 그가 태어나자마자 미국으로 떠나 핵물리학자로 일하다 실종됐다. 모친은 재혼했다. 한대수는 연희전문 초대 학장인 할아버지의 서울 사택에서 유년을 보냈다. 그의 노래 ‘옥의 슬픔’(1974년)이 그때 얘기다. 미국연방수사국(FBI)으로부터 ‘17년 만에 실종자(부친)를 찾았다’는 전갈이 날아왔다. 고등학생 한대수는 뉴욕에 가 난생처음 아버지 얼굴을 봤다. 무심해 보이는 부친, 그가 현지 여인과 새로 차린 가정에서 아홉 명의 낯선 남매에 섞였다. 한대수는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보냈다. 1968년, 모친의 권유로 기타 한 대 메고 한국에 돌아왔다. 답답한 마음을 담아 직접 지은 괴팍한 노래들을 서울 무교동 ‘쎄시봉’ 무대에 토해냈다.
‘나는 한 나라에서 입학과 졸업을 마친 적이 없다. 초등학교는 한국에서 입학하고 미국에서 졸업했다. 중학교는 미국에서 입학하고 졸업은 한국에서 했다. 고등학교 입학은 한국, 졸업은 미국이었다.’(2005년 한대수 글 중)
그가 내년에 미국에 이주한다는 최근 소문은 그래서 더 충격적이었다. “양호를 뉴욕에서 교육하고 싶어 고민했던 건 사실이에요. 근데 이 나이에 돈도 돈이고 쉽지 않네요. 게다가 얼마 전에 프랑스 테러까지 터지고 나니까…. (뉴욕) 공연만은 꼭 성사시켜 보려 노력 중이에요.”
“‘Art is fart!’ 라임(운율)도 기가 막히게 맞죠? 예술은 방귀처럼 이 안에 뭔가 쌓여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 자연스레 터져 나오는 거지. 억지로 뀌려면 병 생겨요. 주위에 그런 예술가가 많았죠. 자기 예술이 좀 평가받기 시작하면 너무 자아에 빠지는 거야. 늘 선글라스를 껴야 되고. ‘유명해진다’에 너무 빠지면 안 됩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이미지를 좋아하는 것일 뿐이죠.”
―평단의 찬사를 받을 때 자만에 빠진 적 없나요?
“애초에 그런 마음도 안 먹었고 스스로도 경계했죠.”
―예술 인생을 돌아볼 때 가장 뿌듯한 시기가 있을 것 같은데요?
“1997년 일본 후쿠오카 콘서트. 음악적 망명을 떠나 뉴욕에서 조용히 상업사진만 하던 때였어요. 하루에 8시간씩 사진 현상소의 암실에서 일하기도 했죠. 근데 방귀처럼 음악을 참을 수 없어서 현지인을 모아 만든 팀이 칭기즈칸이었어요. 세계를 정복하겠다고. 안 되더라고요. 뉴욕이 보통 동넵니까. 2500개 팀이 동시에 투쟁을 하는 곳인데. 그러던 차에 일본에서 연락이 온 거예요. ‘한(대수) 상,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곳에 팬이 많습니다.’ 청계천에서 앨범 사 간 (일본) 사람들이 (음악을) 퍼뜨렸다는 거죠.”
―성탄절에 경주 한국대중음악박물관에서 공연하기로 한 이유는요? 300석밖에 안 되는 좁은 공간인데….
“얼마 전에 다녀왔는데 참 기특한 박물관이었어요. 감동받았어요. 작은 공연을 해줄 수 없느냐고 물어 와서 흔쾌히 하겠다고 했죠. 이제는 공연 하나하나를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해야 돼요. 노래 목소리가 잘 안 나오거든요.”
―목이 언제부터 안 좋아진 건가요.
“일전에 공연을 앞두고 목소리가 안 나와서 병원을 찾았어요. 의사가 ‘당신 창법에도 문제가 있다. 성대를 긁어서 나오는 목소리는 빨리 간다. (노래를) 그렇게 안 할 수 있느냐’고 묻더군요. 답했죠. ‘닥터, 이것이 내 로큰롤인데 어떻게 안 할 수 있겠어요. 이렇게 안 부르면 (제 공연 보러) 아무도 안 옵니다.’”
―그 (가래 끓는 듯한) 목소리는 일부러 내는 건가요, 원래 그런 건가요.
“중학교 때 축농증 수술을 받았어요. 실패했지. 내가 보기에는 그 원인밖에 없어요. 한창때 ‘말버러 레드’를 두 갑씩 피워댄 것도 한몫했겠지. 니코틴 중독, 무섭습니다.”
―마지막 앨범 3부작인 9집 ‘고민’(2002년), 10집 ‘상처’(2004년), 11집 ‘욕망’(2006년)을 LP레코드로 재발매하시죠? 어떤 앨범들인가요.
“‘고민’의 대표곡은 ‘호치민’이죠. 미국을 최초로 항복시킨 인물. 이 사람이 흥미로워서 연구하다 보니 참 대단한 사람이더라고. 감동을 받아 쓴 곡이에요. ‘As Forever’란 곡은 알레한드로라는 우루과이 음악가랑 합작한 거고. ‘상처’는 우리 마누라가 너무 괴롭혔기에…. 그때 난 한국, 옥사나는 뉴욕에서 헤어져 살았거든요. 만나자마자 반해서 내가 프러포즈를 했고 석 달 만에 결혼했는데 너무너무 상처를 주는 거야. 평화스러운 날이 하나도 없어. 음악적으론 아방가르드 재즈 냄새가 나는 앨범이죠. 음악감독 장영규 씨와 작곡팀 ‘복숭아’가 함께 만든 ‘욕망’은 나도 아직 이해가 안 가는 앨범이에요. 이해가 안 가는 재미가 있더라고요.”
―헤비메탈과 내레이션이 경쟁하는 ‘호치민’은 지금 들어도 충격적이에요.
“이야깃거리가 너무 많으니까 내레이션으로 풀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근데 왜 헤비메탈 기타냐면, 말하는 사이에 폭격이 떨어지는 거야. B-59기로 (폭탄을) 성냥개비처럼 (투하)…. 마지막엔 ‘호치민’이 자신을 감추기 위해 쓴 스무 가지 가명을 다 말하는 거예요. 랩적인 요소도 있죠. 저는 음악적 여행을 많이 했죠. 운 좋게도 정말 많은 양분을 받은 사람이에요. 한평생 온갖 음악을 크게, 우렁차게 다 들었죠. 뉴욕 살 때 지하철역(루스벨트 애버뉴) 출구에서 200m 거리에 집이 있었는데, 내가 집에 있다 없다를 옥사나가 100m 전부터 음악 소리로 알았어요. 옆집 사람도 불평하다 하다 그만둬버렸지. 맨해튼 중심가에서 20분 떨어진 덴데. 클래식부터 재즈, 블루스, 로큰롤, 헤비메탈…. 어려서부터 김시스터즈가 우리 집에서 공연했고 안익태 씨는 우리 할아버지 친구여서 자주 왔죠. 비틀스, 엘비스, 밥 딜런을 직접 봤고 지미 헨드릭스가 뉴욕의 필모어 이스트에서 했던 콘서트도 잊을 수 없죠. 키스 재럿은 스무 살 때 봤는데, 야마하 피아노 뒤로 가더니 현을 뜯어서 하프처럼 치는 거야. 앰프를 통해 그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증폭됐죠. 그 충격이란…. 1981년엔 영국 런던에 건너가서 펑크 문화를 접했죠. ‘언쇼커블 뉴요커’(웬만한 걸로는 충격을 안 받는 뉴욕 사람)란 말도 있는데, 거긴 또 신세계인 거야. 코, 혀에 피어싱을 하고 머리를 빨강, 초록으로 물들인 젊은이들이 무조건 ‘파괴’와 ‘멸망’을 노래하고.”
―‘영원한 히피’란 별명, 아직 유효한가요? 히피로서 요즘 이슬람국가(IS)의 테러 사태에 대한 생각은….
“(영원한 히피) 맞아요. 종교 보복 전쟁을 끝낼 방법은 복수가 아니에요. 복수는 더 큰 복수를 부를 뿐이에요. 인류가 이 모든 테러리즘과 폭력을 당장 멈추라고 일어서야 합니다. 수십억 명이 함께 일어나 평화시위를 한다면 저들도 어쩔 거야. 음악도 힘을 보태야죠. 히피는 인류애, 평화주의, 자연을 사랑하는 그린피스와도 관계가 되죠. 전 완전한 평화주의예요. 늘 사인할 때마다 이렇게 쓰잖아요. ‘PEACE!’”
―부친이 미국중앙정보국(CIA)의 세뇌를 받고 기억을 잃었다고 여전히 믿으세요?
“국가 간에 민감한 문제인데…. 그리 생각 안 하면 해석이 안 돼요. 서울에서 명사인 아버지, 부잣집 딸내미인 예쁜 마누라, 이렇게 잘생긴 꼬맹이가 기다리는데 안 돌아온다는 건 말이 안 되죠. 스무 살 넘어 유학 간 사람이 한국말도 다 잊어버리고. 제가 4집 제목을 ‘기억상실’로 지었죠. 우리 아버지 생각하면서. 그 상처를 깊게 갖고 싶지 않았으니까 비틀스처럼 ‘Let It Be’(하려고)….”
―행복했다면 음악을 했을까요?
“그랬다면 절대 음악 안 하지. 아트란 것은 고통의 결과물이거든. 전혀 음악 할 필요 없죠. 그냥 양호하게 가진 걸 누리면 되는 거지.”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절은 언제입니까.
“전 지금도, 이 순간에도 고통받습니다. 크하하하하하하하하하히히히히! 고시원에 앉아서 웃고 있는 사람이야, 나는. 나이 칠십에 아이가 아홉 살이잖아요. 내가 우리 고시원에서 나이 젤 많지. 언제 대학 보내고 시집보낼 거야…. 고통받는 게 살아있단 증명이죠. 유머 감각이 젤 중요해. 다 괴로워요, 우리.”
한대수는 다음 주에 ‘물 좀 주소’의 원곡 가사를 처음 공개한다. 정부의 난도질을 염려해 1974년 발표 땐 뺐던 4절을 그는 두 달 전 새로 녹음한 무반주 버전 ‘물 좀 주소’에 넣었다. 이는 한대수 40주년 헌정 앨범 ‘Rebirth’의 LP레코드에 마지막 곡으로 담겨 10일 발표된다. 문제의 노랫말은 이렇다.
‘아 자유여/그대 날 속여/그대 약속은 어디 있소/허황벌판에 나를 남겨두고서/어디 갔소 어디를 갔소’
임희윤 기자 imi@donga.com